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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잃어버린 어떤 시간이 가망없는 욕망일지라도 때때로 그런 스산함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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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잃어버린 어떤 시간이 가망없는 욕망일지라도 때때로 그런 스산함이 그립다

입력
2014.02.2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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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독서가 은밀한 관음의 쾌감을 선사할 때가 있다. 시선을 사로잡기보다 한사코 흐트러뜨리는 책이 그렇다. 윤곽을 잃어버린 피사체 위에 더 또렷하게 맺히는 상, 혹은 더 적극적으로 초점을 풀어 마치 매직아이의 숨은 그림을 탐색하듯 유쾌한 방황에 나설 때 그 쾌감은 시작된다. 그럴 때 텍스트는 단숨에 따라 읽을 대상으로서의 객체가 아니라 동행하며 대화하는 상대 주체가 된다. 그런 책은 어쩔 수 없이 아껴 읽게 되고, 그런 독서는 느리다 못해 산만해지곤 한다.

그 과정에서 찾아낸 숨은 그림, 또 방황의 울렁거림, 그 느낌을 만끽할 때의 내가 머물던 어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나는 쉽사리 놓지 못한다. 물론 그 느낌의 기억들이 내가 읽은 텍스트의 주제나 내용, 혹은 어떤 구절과 인과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훗날 다시 읽더라도 복기할 수도 없다. 나 아닌 누군가에게 그 모호한 연관성을 전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을 떠올리며 매번 느끼던 당혹감도 그런 꺼칠한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책의 내용과 개인적 감상을 소개하는 것으로는 내가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이유를 전달할 수 없고, 다시 읽고 싶은 이유를 설명하자니 나 아닌 누군가의 공감을 얻을 자신이 없었다. 그냥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라면 여기저기서 뽑아놓은 양서나 고전 추천도서 목록을 소개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몇 권 꽂혀있지 않은 책장 앞을 이리저리 바장이다가 '뭐 이 정도면' 하는 식으로 책을 골랐던 것 같다.

내가 아끼고 좋아하고 또 그리워하는 것을, 그것이 무엇이든, 누구에게 소개해서 공감을 얻는 일은 어렵고 불편하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 어려움이 스스로에게도 해당되는 한계 같은 거라고, 가망 없는 욕망이라고 했다. 의 이런 문장이 그렇다.

"우리가 안 지 오래된 곳들은 단지 공간의 세계에 속하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편의상 공간의 세계에 배치할 따름이다. 그런 곳들은 그 당시의 우리의 삶을 구성하던 잇달린 인상 한가운데 있는 얇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형상에 대한 회상이란, 어떤 한 순간에 대한 그리움에 지나지 않는다. 가옥들도, 길도, 큰 거리도, 덧없는 것, 아아! 세월처럼."(국일미디어ㆍ2권 349쪽)

끝없이 붙잡고 미끄러지는 욕망과 성취의 달음박질은 주체와 대상이 달라진 줄도 모른 채 환상 같은 맹목의 힘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러다 한 순간 어떤 계기에 멈춰 서서 돌이켜본 뒤 그 잃어버린 시간의 덧없음을 발견하게 된 자의 스산한 그리움이 나는 좋았다. 그리움의 대상은 프루스트의 저 한 '공간'처럼 물리적 형상만은 아니다. 사물도 사람도 책도, 한 순간의 기억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의 장황하고 중층적인 서사, 집요하고 밀도 높은 묘사와 사념의 문장들로 4,000쪽 남짓 이어지는 이 소설은 질로나 양으로나 단숨에 읽기는 어렵다. 나는 두어 차례 이 책에게서 거절당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가끔 이 책이 곁을 준 계기와 사연이 궁금해질 때도 있다. 잃어버린 어떤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이 비척비척 스미던 때여서? 내가 섰던 자리가 작가의 표현처럼 '망망한 차원의 기점' 같은 곳이어서? 작중 화자는 "나는 내 발 밑-사실은 나의 안이지만-에 마치 몇 천 길의 골짜기를 굽어보듯이, 무수한 세월을 바라보자 어지러웠다"고 썼다. 하지만 누구나, 또 언제나, 잃어버린 시간을 응시하는 주체는 '머리가 뱅뱅 도는 시간의 꼭대기에 앉아있는 나'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나는 작중 화자와 멀찍이 동행하며 시간의 꼭대기에 선 나와 나의 잃어버린 시간을 읽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책은, 콩브레의 안경점 주인이 손님 앞에 내놓는 확대 유리알과도 같이 일종의 확대경에 지나지 않아, 나의 책은 그 덕분에 그들 자신을 읽는 방편을 내가 제공해주는 구실을 한다."(11권 478쪽)

'나'를 읽게 하는 확대경 같은 벗들이, 요컨대 그리움이 많은 이들이 나는 부럽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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