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이탈리아에서 발간된 '이단적 맑스주의자'들의 논문집이다. 논문은 1990년대 '공통감각' 등의 학술지에 게재된 것들로 엮은이 워너 본펠드의 표현으로 "시류를 거스르는 작업"의 결과다. 유럽 통화위기, 멕시코 페소화 폭락 사태, 아시아 금융위기 등이 연이은 1990년대 맑스주의를 재구성하고 해방의 기획으로서 탐색한 글들이다. 그래서 지나간 얘기를 지나간 사유의 틀로 다루는 논문 뭉치로 취급해버리기 쉽다. 그러나 원서가 발간된 후 10년 동안 심화ㆍ확장된 지구적 자본주의의 폐해, 곧 포스트신자유주의의 착취가 공고화하는 흐름의 바닥에 깔린 구조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실마리가 여기 담겨 있다. 더불어 21세기 인간의 '자기해방 투쟁'에 필요한 전략의 단초를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탈정치(post-politics)'의 개념을 우선 이해해야 한다. 저자들이 사용하는 탈정치라는 용어는 우리가 흔히 쓰는 '정치적 무관심'과는 별개의 개념이다. 이 책에서 탈정치란 '공통적(common)인' 것의 구성에 직ㆍ간접적으로 참여하는 모든 사회적 실천 행위를 가리킨다. 사적 소유지배 및 국가의 통제와 대립하는 개념이 공통적인 것인데, 2000년 볼리비아의 물사유화 반대투쟁처럼 제한된 자원 분배를 결정하기 위해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일이 이에 해당한다. 이 책은 선거와 대의정치로 표상되는 현 정치 시스템의 한계를 인정하고 정치를 넘어서는, 곧 탈정치를 새로운 코뮤니즘의 양태 혹은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익이라는 모호한 추상관념의 외피를 쓴 국가와 경제의 보수적 물신주의뿐 아니라, 자본의 지구화를 불가피한 전제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진보 정치도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이 책의 주된 관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자유로운 삶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의 근거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이 책의 이단 맑시스트들은 우리 속에 이미 전복적 잠재력이 있으며, 그것을 현실적 힘으로 승인할 때 담대한 희망의 기획이 시작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시위에서 시작해 최근의 철도민영화 저지 투쟁까지, 진보나 개혁이라는 개념으론 명쾌히 설명되지 않는 우리 내부의 꿈틀거리는 힘을 들여다보는 데 이 책의 탈정치가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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