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재계서열 3위인 SK그룹이 창사 이래 최장의 경영공백 사태를 맞았다. 27일 대법원이 최태원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에 대해 각각 징역 4년, 3년6개월의 원심을 확정함에 따라 SK그룹은 넘버 1,2가 모두 자리를 비우는 최악의 오너 부재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SK그룹은 상고심을 앞두고 파기 환송에 총력을 다했다. 지난 11일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과 LIG그룹 구자원 회장이 모두 집행유예로 풀려나면서, SK측 기대감도 커졌다. 하지만 대법은 결과적으로 최악의 시나리오를 안겨줬다. SK그룹은 이날 공식입장을 통해 "참담하고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SK그룹은 오너 공백을 대체할 경영시스템은 어느 정도 구축해놓았다. 전 계열사가 총수 지도 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선단식 경영 대신 개별 계열사가 독립경영을 하면서 사안에 따라 협력하는 '따로 또 같이'시스템이 가동 중이다. 주요 현안은 6개 주요 계열사 CEO로 구성된 수펙스추구협의회에서 결정하는 '집단지도체제'도 시행되고 있다. 총수대행역할을 맡고 있는 김창근 부회장(수펙스추구협의회의장)은 이날 판결 후 긴급 회의를 소집, "SK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 없이 성장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스템이 작동한다 해도, 총수 개인을 대체하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특히 대형 신규사업진출이나 굵직한 해외수주 등은 오너 외엔 도저히 풀 수 없는 사안들이라 최 회장의 부재는 그룹 경영의 중대 차질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한 관계자는 "최근 SK그룹이 단행한 M&A 중 가장 성공한 것이 하이닉스 인수다. 당시 실무진들은 반대했지만 최 회장은 밀어붙였고 결국 지난해 하이닉스는 SK 계열사 중 가장 많은 이익을 냈다. 과연 오너 아닌 전문경영인이 이런 초대형 M&A를 선뜻 결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전문경영인 체제에서 일상적 결정은 가능해도, 그룹의 미래가 달린 '빅딜'은 결코 성사되기 힘들다는 얘기다.
우려는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최 회장 수감 이후 SK그룹은 굵직한 투자기회를 여러 차례 놓치고 말았다. SK에너지는 작년 11월 호주의 유류공급업체인 유나이티드 페트롤리엄(UP) 지분인수 예비입찰에 참여하려다 결국 포기했다. 국내에선 STX에너지 인수를 위해 의향서까지 제출했지만 최종 단계에선 불참하고 말았다.
신시장 개척문제도 심각하다. 최 회장은 1990년대 이후 중남미 자원시장 진출을 위해 각별히 공을 들였다. 중남미 국가 대통령들도 여러 차례 면담하는 등 인적 네트워크도 구축했다. 하지만 최 회장 구속으로 모든 게 올 스톱된 것으로 알려졌다.
태국 말레이시아 등에선 SK그룹의 건설 에너지 IT등 계열사가 함께 들어가 사회간접자본을 통째로 건설하는 '패키지딜'전략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현지 정ㆍ관계인사들과 수없이 접촉했고 성사를 목전에 두기도 했지만, 현재는 전혀 진척이 없다. 최 회장이 직접 뚫었던 터키시장 역시 답보상태다. 회사 관계자는 "오너가 가야만 현지 실력자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 네트워크가 끊어지니까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양상이다"고 말했다.
2003년 분식회계로 최 회장이 구속됐던 기간은 8개월, 그러나 이번엔 진행된 수감기간을 감안해도 향후 3년 가량 경영공백이 불가피하다. 기대할 건 사면밖에는 없지만, 지금은 얘기를 꺼낼 분위기도 아니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인 셈이다.
김현수기자 ddacku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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