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의 전염을 막기 위해 전체 가축 1,300만 마리 중 3분의 1에 가까운 350만 마리를 죽인다면, 그런 '방역'을 '합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알다시피 이건 2011년 구제역 파동 때 한국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태다. 지금도 방역을 위해 발병지점 반경 3km 원을 그려놓곤 그 안에 있는 멀쩡한 닭과 오리를 모두 죽이고 있다. 이번 조류독감 방역을 위해 이미 400만에 가까운 닭과 오리들이 '살처분'당했다. 그냥 두면 그 이상 죽을까? 그 요란한 '방역' 덕에 살릴 수 있는 닭과 오리는 대체 몇 마리나 될까? 왜 이런 어이없는 방역이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몸에는 간염균, 대장균 등 수많은 세균이 함께 산다. 낯선 세균과 접촉하면 병이 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로 적응하여 공존한다. 집단도 그렇다. 인간은 먹고살기 위해 일부러 다른 동물들을 키우기도 하고, 많은 인구가 모여 살기도 한다. 인구만큼 늘어나는 쓰레기와 배설물은 다시 다른 생물들을 불러모은다. 거기서 적응하지 못한 신체는 병을 앓게 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로 적응하면 다시 공존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영국인들은 자신이 호주에 '이주'하며 들여온 야생토끼가 천적의 부재로 급속히 늘어나 목초지가 감소하자 이를 줄이기 위해 1950년 치명적인 점액종증 바이러스를 토끼에 이식했다. 첫해에 감염된 토끼의 사망률은 99.8%였다. 다음 해엔 90%, 7년 후에는 25%로 감소했다. 이런 면역력의 증가는 토끼가 그 바이러스에 적응했음을 뜻하지만, 역으로 바이러스가 자신의 숙주에 적응했음을 뜻하기도 한다. 숙주를 죽이는 자신의 독성을 완화시켜 숙주와 함께 공존할 길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염병이란 병균의 공격에 의해 우리가 입는 손상이라고 생각한다. 파스퇴르가 전염병의 원인이 세균이었음을 발견하면서, 세균이란 우리 생존의 적이라는 생각은 과학의 이름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파스퇴르는 감염의 공포 때문에 남들과 악수조차 꺼리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그런 세균을 퇴치하는 위생과 방역이 국가적 임무로 부각되었다. '보건소'라고 불리는 위생경찰이 만들어졌고, 신체 내부에서의 방역을 위한 백신으로 전염병이 '정복된' 세계가 올 것이란 환상조차 유포된 적도 있었다.
우리 내부에 침투한 적을 퇴치하는 것이라는 군사 주의적 태도가 '방역'이나 '면역'의 관념을 지배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군사 주의적 관념 속에서 방역의 목적은 적과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육하는 동물의 3분의 1을 직접 죽이는 어이없는 '학살'을 감행하는 한이 있어도 적은 퇴치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전쟁인 것이다. 그게 매번 이 처참한 학살을 반복하게 하는 것일 게다.
우리 자신도 잘 알다시피 병이란 단지 '병균'에 감염된다고 모두 발생하는 게 아니다. 반대로 환경이 나쁘면 없던 병도 생긴다. 한 마리당 A4 용지 반장 넓이의 공간을 주곤 수백 마리를 닭장 안에 '수용'해 놓고선 항생제를 항상 먹이며 예방하는 농장이라면, 병이 발생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닐까? 움직이고 활동하지 못하는 동물이 병든다는 것은 인간 자신이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철새가 옮긴다고 하지만, 바로 그런 '집단농장'이야말로 철새가 옮기는 병의 발생지는 아닐까? 철새 또한 그 끔찍한 경제적 축산의 피해자가 아닐까? 정말 병을 막기 위해서라면 이런 환경을 바꾸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가격과 비용의 계산을 한다 해도, 저 거대한 학살의 방역비용을 차라리 여기에 쏟아붓는 게 훨씬 경제적이지 않을까?
경제학적 계산에 비추어보아도 비합리적인 이 끔찍한 학살을 반복하면서도 이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지 않는 것, 그건 틀림없이 적대와 전쟁의 군사 주의적 방역 개념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몇 년마다 다시 방역을 위해 수백만 마리의 동물을 살해하는 방역전쟁을 반복하여 보게 될 것이다. 아, 언제까지 우리는, 가축과 새들은 '과학'의 이름 아래 작동하는 저 강력한 무지의 권력을 견뎌야 하는 것일까?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기초교육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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