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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2월 28일] 스스로에게 '안녕'하냐고 묻는다

입력
2014.02.27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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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턴트 라면을 자주 먹는다는 사람들은 매력이 없다. 라면을 끓일 줄 아는 게 유일한 요리라는 후배에게는 마음이 가질 않는다. 세상의 여러 맛을 인스턴트 라면으로 알고 이해하는 방식에 적어도 나는 손을 들어줄 수가 없다.

라면이 아닌 무엇일 수도 있을 터인데 라면에 의존하는 청춘들을 보자면 스스로를 포기한 사람이거나 세상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사람 같아서 하는 말이다.

그저 씹어 삼키는 일은 쓸쓸하다. 나의 청춘도 그런대로 쓸쓸했다. 그 쓸쓸함이 무의미해질 무렵, 더 이상 라면에 신세를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허기를 가리기 위해서라도 요리를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정신적인 것이기도 했던 허기는 친구들, 후배들, 사람들을 불러 따뜻한 식사를 하는 것으로 겨우 가려졌다.

제대로 한번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러다 언젠가 턱 하니 식당을 내고 싶은 것도 다른 욕망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비해 유난히 누군가에게 뭔가를 먹이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하다는 데 있다. 맛있게 음식을 잘 먹는 사람과 식사를 하는 일이 즐거운 것은 그 가득 채워지는 느낌만큼 소통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려니와 그 자리에서만 퍼지는 알 수 없는 묘한 기류의 정체에 나를 몰아넣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안부와 행복과 안녕이 넘쳐나는 그런 자리. 그런 자리에 음식은 절대적인 소품이 된다.

내가 행복한 것은 그저 행복한 것이지만 남의 행복에 관여하겠다는 것은 그 행복을 다시 나눠 갖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좋은 말을 입으로 내뱉는 것을 포함하여 좋은 것을 입으로 가져가는 일이 얼마나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지를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된다.

나는 어떤 음식을 먹을 때 음식을 만든 사람의 얼굴이 보고 싶어 주방으로 뛰어들어가고 싶은 충동에 자주 사로잡힌다. 잘 된 음식이건 안 된 음식이건 이야기를 해야만 소화가 될 것 같고 이야기를 들어야 비로소 완벽해지는 음식을 앞에 둘 때가 있다. 접시에 담겨 눈앞에 놓인 상태의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음식은 마술 같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 많은 혼자인 사람들은 전자레인지 하나만으로 요리가 완성되는 식품에 기대어 산다. 연명하자는 것이다. 연명은 무서운 단절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 단절은 결국은 몸과 정신에 병(病)으로 쉽게 퍼진다. 혼자 사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 혼자 잘 삶으로써 우리는 안녕해야 한다.

유럽의 어느 영화학교에서는 신입생을 뽑을 때 요리를 어느 정도 하는지 음식 만들기를 시켜본다고 한다. 그 사람이 만든 요리는 그 사람을 설명한다. 그 사람의 감각과 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그리고 섬세함과 상상력의 정도를 가늠한다.

나 또한 세상을 읽고 자신을 만들어가는 데 적당한 요리실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양념을 첨가하는 순서와 불과 칼의 속성을 습득한다면 당연히 세상을 조각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잘할 줄 아는, 잘 만드는 음식 하나쯤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정말 많은 차이를 보인다. 적어도 그런 사람은 스스로에게 잘해주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떠받치고 사는 느낌의 사람으로도 보이고, 세상을 향한 기본기를 다진 것처럼도 보여서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남들과 다른 리트머스 시험지를 품고 살 거란 생각도 들게 한다.

호박을 썰고 감자 껍질을 벗기는 사람의 마음에는 좋은 빛이 비친다. 혼자 먹기 위해서가 아닌 팔을 걷어붙이고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시작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인생을 디자인할 채비를 마친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세상 여러 맛에 말을 걸기 위해 요리 한 가지쯤은 확실하게 배워놓자.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한 가지 요리를 하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일은 쉽고도 자연스럽다. 사람의 숲에서 사람의 온기를 나누기도 어렵지 않다.

누군가를 위해 따뜻한 음식 하나를 차려낼 수 있는 사람이 멀리 간다. 그런 사람의 심지는 빛이 나고 중심은 오래간다. 그것이 내가 믿어보려는 '안녕'의 방식이다. 우리가 당장 원하는 것이 케케묵은 행복이 아니라 진정한 안녕이라면 말이다.

이병률 시인ㆍ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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