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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2월 28일] '플란플란 싸자(천천히 걸어)'

입력
2014.02.27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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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땅' 발리에 머문 지도 이제 두 달이 되어간다. 이곳에서의 하루는 일찍 시작된다. 새벽부터 남성다움을 과시하는 수탉들 때문에 늦잠을 잘 수가 없으니. 평생 부엉이로 살아왔는데 발리에 와서 아침형 인간이 되어버렸다. 오전 6시쯤 일어나 방문을 열고 책상 앞에 앉으면 주인아줌마 이브가 아침 공양 차낭을 바치는 모습이 보인다. 하루 세 번씩 바치는 차낭이건만 매번 정성스럽기만 하다. 서너 시간쯤 원고를 쓰고 나면 오후에는 동네 마실을 나간다. 내가 집을 나설 때면 이브는 늘 묻는다. 어디 가느냐고. 나는 "잘란자란 싸자(그냥 걸으러 가요)" 라고 답한다. 그러면 이브는 "플란플란 싸자(천천히 걸어)"라며 웃는다. 이 짧은 대화는 마치 주문처럼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발리에서는 모든 게 그렇듯 느긋하게, '플란플란'하게 흘러간다. 매사에 서두르는 법이 없다. 즐겨가는 동네 식당은 주문하고 30분 이상 기다리는 건 기본이다. 물건을 살 때도 시간을 들여 조금씩 가격을 깎아준다. 비자를 연장하는 일만 해도 일주일이 걸린다. 심지어 아기가 태어났을 때도 인간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다. 발리 사람들은 아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기 때문에 6개월 동안은 땅에 아기의 발을 딛지 못하게 한다. 그때까지 아기는 사람들의 품에서 품으로 이동하며 자란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뭐든지 서울에서의 속도로 일을 처리하려다가는 제 속이 터지기 일쑤다.

며칠 전, 이브의 친정 마을에서 열리는 오달란(종교 제례)에 따라갔다. 발리의 여자들은 일생의 3분의 1을 오달란을 준비하는 데, 3분의 1은 오달란을 치르는 데, 나머지 3분의 1은 오달란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데 쓴다는 농담이 있다. 하지만 발리에서 종교의식이나 전통문화는 노인이나 여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기와 청년과 어른, 남녀 모두가 기꺼이 참여하는 마을 전체의 의식으로 살아있다. 나는 그날 옷장에 넣어둔 싸롱을 꺼내 입고 이브의 레이스 블라우스를 빌려 그 위에 스카프를 두르는 전통 옷차림을 했다. 발리의 사원은 그렇게 복장을 갖추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처음 본 오달란은 종합버라이어티쇼였다. 종이 인형극과 가면을 쓴 마당극, 발리식 오케스트라 가멜란의 연주, 피단다(마을의 종교지도자)의 기도와 경 읊기, 코코넛을 태우고 물을 뿌리는 정화 의식 등 제례는 온갖 화려한 볼거리로 넘쳐났다. 문제는 그 모든 일이 신전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 인형극을 보다가 마당극을 하는 곳으로 달려갔다가, 가멜란의 연주를 듣다가 공양을 바치는 제단으로 뛰어가고…. 이렇듯 정신없이 오가는 건 나뿐이었다. 발리에서는 오달란이 신을 위한 의식이기 때문에 '인간 관객'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나는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이슬람보다 발리의 힌두교도들이야말로 신에게 바쳐진 사람들이라고 믿게 되었다.

물론 발리는 천국이 아니다. 지상에 천국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을 정도로 부패는 삶의 방식이 되었고, 외국인은 종종 터무니없는 바가지나 사기의 대상이 된다. 밀려드는 외국인들 때문에 발리의 아름다운 계단식 논은 점점 호텔로 변해가고 있다. 이러다 발리의 전통문화마저 사라지는 게 아닐까 불안해진다. 하지만 발리인들은 보기보다 영리하고 강인하다. 며칠 전 이브의 남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너희 한국인들은 열심히 일해서 돈 벌면 여행 가는 데 쓰지? 우리는 돈만 생기면 오달란 하는 데 다 써. 그래서 어떤 외국인들은 우리를 비웃지. 하지만 우리가 이런 걸 하지 않으면 외국인들이 발리에 오겠어? 발리가 다른 나라와 똑같아지면 누가 여기에 오려 하겠어?"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왜 발리를 사랑하는지를. 이들은 우붓 중심가에 들어오려던 맥도널드 매장을 막아낸 경험도 있다. 하긴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금지된 닭싸움조차 발리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를 핑계로 살아남았다. 개발과 성장을 추구하다 전통적인 가치를 잃어버린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과 발리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플란플란'하게 흘러가는 삶의 속도 속에서 지킬 것은 지키는 의연함이 엿보이니.

김남희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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