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5일 발표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서 새 의제로 눈길을 끈 것은 '상가 권리금 제도적 보장'이었다. 상가 임차인들의 권리금은 엄연한 실체가 있지만, 법적 사각지대에서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해 끊임 없는 분쟁 대상이었다. 용산참사의 배경에도 재개발 과정에서 임차인들이 권리금을 보장 받지 못한 문제가 놓여 있었다.
무형의 시장가치인 권리금 일반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문제지만, 정부나 정치권이 권리금 때문에 빚어지는 억울한 사연을 계속 방관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임차인들이 건물주에 의해 부당하게 권리금 회수 기회를 박탈 당한다거나, 재개발 과정에서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문제는 해결이 시급한 대목이다.
흥미로운 것은 상가 권리금 의제를 먼저 제기한 이가 민주당 민병두 의원이라는 점이다.민 의원은 용산참사 5주기(1월 19일)에 즈음해 상가권리금 피해사례 발표회 등을 가진 데 이어 상가권리금 보호에 관한 특별법을 대표 발의했다.
상가 권리금은 600만 자영업자들의 이해와 직결된 민생 이슈로 '을'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민주당이 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슈를 주도해봄직한 사안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지도부 차원에서 상가 권리금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는 거의 없었다. 담화문이 나오기 전까지 민주당 최고위원회에서 상가권리금 문제가 거론된 적도 없었다.
박 대통령의 담화 발표로 상가 권리금 문제가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이 의제는 사실상 청와대가 주도하는 모양새가 됐다. 애초 야당 의원이 제기한 사안을 청와대가 적극 끌어안으면서 이슈를 선점한 셈이다.
박 대통령은 이 외에도 이번 담화문에서 파급력이 큰 개혁적 의제를 여럿 제시했다. 공무원연금 등 3대 공적 연금 개선이 대표적이다. 국가재정과 국민연금과의 형평성 등을 감안하면 필히 개선해야 하지만, 공무원의 저항 등으로 역대 정부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 의제를 과감히 꺼내 들었다.
박 대통령은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간 불합리한 임금격차를 줄이고 비정규직 해고 요건을 강화해 고용보호 격차를 줄여나갈 것"이라고도 밝혔다. 고용보험 가입 대상을 일용근로자까지 단계적으로 확대하겠다는 내용도 담겼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이나 고용조건의 엄청난 격차는 우리 사회의 핵심 환부다.
박 대통령이 취임 후 경제민주화 후퇴 논란을 빚었지만 이번 담화문에선 내용상 좌클릭한 의제를 담은 것이다. 특히 공적 연금 개선, 비정규직 해고요건 강화, 임금격차 축소는 기획재정부가 배포한 25개 실행계획에는 빠져 있고 대통령 담화문에만 등장하는데, 3개년 계획 수립 과정의 혼선을 감안하면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돼 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혹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나온 의제 선점용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지난 대선을 생각해보자. 당시에도 박 대통령은 야권이 제기해왔던 경제민주화와 복지 의제를 적극 끌어와 오히려 자신의 브랜드로 만들었다. '국민대통합'이란 의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선 이후 박 대통령의 행보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공약 후퇴 논란을 빚었고 국민대통합과도 거리가 멀었다. 이번도 비슷한 궤도를 밟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드는 것도 이런 데자뷔 때문이다. 행여 선거용이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선 이제부터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
아울러 박 대통령이 언급한 의제들은 이해 당사자들에 대한 설득, 갈등 조정, 타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 스타일이 이 같은 조정과 타협의 정치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성과를 내기 위해선 대통령의 의지 만이 아니라, 통치 스타일 자체의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물론 선거용 의제조차 챙기지 못한 쪽은 야당이다. 총선과 대선 패배 이후 민주당의 정답은 분명했다. '민생문제에 대한 책임 있는 대안을 내놓는 정당'이었다. 하지만 대안은 둘째치고 민생 의제 자체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여전히 국회의원들에게만 민감한 기초선거 공천 문제 등 정당 이슈에만 매몰돼 있는 형국이다.
송용창 정치부 기자 hermee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