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 '섹시화보'란 이름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이상화 선수의 컬러 사진들을 처음 봤을 때 두 가지에 놀랐다. 첫 번째는 이 사진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이상화의 파격 변신. 원래 예쁜 선수란 건 알았지만, 아무리 메이크업 효과를 고려한다 해도 그의 여성적 매력은 분명 상상 이상이었다.
사실 더 흥미로웠던 건 화보촬영 시점이었다. 국민적 기대가 집중된 금메달 후보가 거사를 코 앞에 둔 시점에, 그냥 CF도 아니고 '하의실종'같은 타이틀이 붙을 법한 화보를 찍는다는 건 우리나라에선 좀처럼 꿈도 꾸기 힘든 일. 만약 금메달에 실패한다면 '화보 찍을 때부터 알아봤다'는 비난이 쏟아질 건 뻔한데, 정말이지 '발칙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이상화는 금메달을 딴 후 TV프로그램에 출연해 '긴장을 풀고 기분을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확실히 이건 큰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나 지켜보는 국민들이나 예전과는 다른 여유로움 혹은 유연함 같은 게 느껴졌다. 무슨 전쟁 치르듯 올림픽에 나가고, 선수단 얼굴엔 오직 비장함과 독기뿐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고, 목표했던 순위는 꼭 달성해야 성공적 올림픽으로 평가되고, 메달 없는 선수 혹은 목표했던 메달 색깔이 아닌 선수들은 공항에서 해단식조차 없이 뿔뿔이 흩어져야 하고…. 이런 삭막한 풍경들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변화는 이번 소치 동계올림픽 내내 확인할 수 있었다. 이규혁이 그의 생애 마지막 올림픽에서 마지막 레이스를 끝낸 뒤 주저 앉아 가뿐 숨을 내쉴 때, 울컥하는 느낌을 받은 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게다. 두 번의 올림픽에서 두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건 이상화의 '스코어'가 위대했다면, 비록 메달 하나 없이 끝났어도 올림픽에 여섯 번이나 도전했던 30대 후반을 바라보는 노장 스케이터의 '스토리'는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여자 쇼트트랙 박승희의 500㎙ 동메달은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기 때문에 실망스러울 법도 했지만, 경기 중 충돌로 넘어지고 일어나서 뛰다가 다시 넘어지는 장면에 많은 이들은 오히려 미안한 마음까지 갖게 됐다. 가장 억울하고 아쉬운 건 본인이겠지만, 그래도 찌푸리거나 풀 죽기보다는 활짝 웃는 모습으로 시상식에 나타나 훨씬 보기 좋았다는 게 일반적 반응이다. 과거엔 은메달을 따도 금메달이 아니라는 이유로 죄지은 듯 한 표정을 짓는 선수가 많았는데, 이번 소치에선 분명 그런 얼굴은 사라졌다.
확실히 이제는 모두가 금메달 강박에서 벗어난 듯싶다. 동료 선수들을 응원 나온 이상화가 관중석에서 들고 있던 '금메달이 아니어도 괜찮아'라는 글귀는 선수단뿐 아니라 현재의 일반 국민정서이기도 했다. 모태범과 이승훈이 밴쿠버 때만큼 못했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고, 안현수가 러시아 국기를 흔들어도 배신자라고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설령 김연아가 편파 판정 아닌 실력으로 은메달에 그쳤어도 충분히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낯설기만 했던 컬링은 동계올림픽 최고의 주목종목이 되었다. 주장 김지선의 '헐~'이란 알 듯 모를 듯한 괴성조차 인기를 끌었다. 결과가 좋으면 더 좋겠지만, 보는 과정이 즐겁고 감동적이면 국민들은 기꺼이 만족한다는 방증이다. 국가별 메달순위 13위로 목표(10위)에는 실패했지만, 체육계의 걱정과 달리 많은 국민들은 애초 왜 그런 목표를 세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단 올림픽만, 스포츠만 그런 건 아닐 게다. 사생결단으로 달려들고 승자에게만 웃을 자격을 줬던 수십 년 성과지상주의, 목표지상주의에 이젠 다 이골이 났다. 전진, 도약, 달성, 쟁취 같은 단어는 보기만해도 거부감과 피로감이 느껴진다.
이렇듯 국민들은 다 아는 걸 유독 정부만 모를 때가 많다. 지금도 정부는 국민소득 몇 만 달러, 세계 몇 대 경제대국 같은 목표를 제시하는데, 단언컨대 티끌만큼의 공감도 얻지 못할 것이다. 스토리 없는 스코어, 정부정책이 번번이 안 먹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성철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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