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후 가뜩이나 악화된 한일관계가 최근에는 아예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렵사리 대화 물꼬를 트는가 싶으면, 또다시 대형악재가 불거지는 상황이 반복되는 등 출구 없는 터널에 갇힌 모습이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사죄한 고노 담화에 대해 20일 저녁 재검토 입장을 밝힌 것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우리 정부도 이례적으로 다음날 새벽 1시쯤 입장을 내고 "피해자들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과 상처를 다시 안기는 몰지각한 행동에 나서지 말라"고 강력 대응했다. 정부 관계자는 "통상 다음날 아침에 입장 자료를 내지만 이번 사안은 매우 엄중해 즉각적으로 대응한 것"이라며 분노와 실망을 나타냈다.
우리 정부가 격한 반응을 보이는 건 위안부 문제해결이 시급하기 때문이다. 독도 영유권, 교과서 왜곡 등 다른 이슈도 많지만 인도적 명분에서 국제사회 지지를 받는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춰 한일관계의 꼬인 실타래를 풀려는 우리 입장과 달리, 일본은 보란 듯이 거침없는 우경화 행보를 고수하며 자꾸 엇나가고 있다.
일본 시마네현이 22일 개최할 다케시마의 날 행사도 우리 정부를 크게 자극하고 있다. 일본은 이 행사에 중앙정부를 대표해 차관급 인사를 파견할 방침이다. 한국이 수 차례 우려를 표명했지만 일본은 막무가내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이날 행사에 일본 정부 인사의 참석이 확인되는 즉시 외교부 대변인 명의의 항의성명을 발표하고, 23일에는 주한 일본대사관 정무공사를 초치할 것으로 전해졌다. 또 동원 가능한 다른 대응조치도 다각도로 검토 중이다.
일본의 계속된 도발로 한일관계가 개선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3ㆍ1절 경축사를 통해 대일 강경기조에 대해 직접 언급할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온다. 이럴 경우 미국이 희망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4월 아시아 순방 이전 한일관계 개선은 사실상 어렵게 된다.
다만 아직 두 달 정도 시간이 남아 있어 반전 계기를 잡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실제로 정부가 일본의 고노 담화 재검토 방침이 나오자마자 21일 새벽 서둘러 반대 입장을 내놓은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한국은 새벽이지만 미국에서는 당국자들이 업무를 보는 낮 시간에 주의를 환기시켜, 고노 담화 인정을 요구해 온 미국을 통해 우회적으로 일본의 태도변화를 노렸다는 것이다.
봉영식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오바마 대통령 순방 이전에 일본이 과거사 현안에 대해 한국과 진지하게 협의하겠다는 정도의 입장이라도 밝힌다면 한일관계에 돌파구가 열릴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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