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소치 동계올림픽이 화려하게 문을 열었다. 러시아의 드넓은 전역을 소개하는 놀랍도록 화려한 개막식은 '차르(Tsar)'가 지배하던 러시아 제국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옛 소련의 위세를 되찾아 '위대한 러시아'의 현대판 차르가 되고 싶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의욕이 읽혀지는 개막식이었다.
최근의 러시아 여론조사기관 레바다센터에 따르면 푸틴의 지지율은 65%에 이른다. 푸틴은 권위주의적이며 중앙 집권적인 리더십으로 오랫동안 높은 지지율을 유지해왔다.
"러시아가 강해야 러시아를 존중한다"는 지론으로 서방과의 외교에 대립각을 세운 푸틴은 지난해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광범위한 도ㆍ감청 행위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의 러시아 망명을 받아들였다. 또 시리아 화학무기 폐기와 이란 핵협상 합의에서도 핵심 역할을 하는 등 굵직한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푸틴은 옛 소비에트 연방국들을 다시 러시아의 영향권에 단단히 묶어두겠다는 심사다. 푸틴은 이들 국가들을 한데 묶어 유럽연합(EU)과 비슷한 성격의 유라시아경제연합(EEU)을 만드는 게 목표다. EU와 러시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 조지아 몰도바 벨라루스 등에 대해 주요 수출품의 판로를 막거나, 천연가스 공급 가격을 올리고, 적대국에게 무기를 판매하겠다는 위협도 가해가며 전방위 압박을 해오고 있다.
마초적 카리스마를 내뿜는 푸틴은 밖으론 이토록 강하면서도 안으론 자상한 지도자임을 부각시키려 노력한다. 푸틴은 올해 새해 벽두부터 민심 보듬기 행보에 나섰다. 지난해 가을 최악의 홍수로 심각한 피해를 본 극동 하바롭스크를 전격 방문해 현지 주민 및 구조대원들과 새해맞이 파티를 하며 위로했고, 곧이어 볼고그라드로 날아가 열차역과 버스 등 잇단 자폭테러가 발생한 현장을 찾아 주민들을 달랬다. 올림픽 기간엔 훈련 중 넘어져 척추를 다친 러시아 여자 프리스타일 스키 선수 마리아 코미사로바를 위로하기 위해 직접 병문안을 갔고, 빅토르 안(안현수) 등 좋은 성적을 내는 선수들을 직접 찾아가 격려하며 각별한 애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푸틴 이벤트'인 소치 올림픽도 다 끝나간다. 이젠 올림픽 기간 애국주의에 가려졌던 체제 비판의 목소리도 조금씩 불거져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사실 푸틴의 지난 집권기간 높은 지지율은 경제성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천연가스와 높은 원유가격이 뒷받침 됐던 경제 호황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푸틴의 지지도는 향후 경제가 악화될 경우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러시아 경제는 푸틴이 권력을 잡은 2000년부터 2008년 금융위기 전까지 평균 경제성장률이 6.9%로 잘나갔다. 하지만 2009년부터는 내리 3년간 4.1%로 가라앉았고, 지난해는 1.3%로 뚝 떨어졌다.
3선에 손쉽게 성공한 푸틴이지만 정치적 토대가 그리 단단한 건 아니다. 지난해 9월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서 푸틴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현 시장은 반푸틴 운동가에게 가까스로 승리를 거뒀다. 푸틴이 외교에 올인하며 반미 노선을 고수하는 이유를 그의 정치적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원유 의존도가 높은 러시아의 허약한 경제 구조, 장기 집권에 대한 국민 반감 때문에 국제 사회에서라도 강한 러시아의 이미지를 구현해야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국제무대에서 푸틴의 호전적이고 과장된 언동은 국내 정치용일 수 있다.
올림픽이 끝나면 푸틴은 다시 시리아 내전, 우크라이나 사태 등과 같은 주제를 놓고 서방의 주요국들과 치열한 힘겨루기를 할 것이다. 아마도 푸틴은 올림픽 개막식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기껏 잔칫상을 차려놓고 초대했는데 매몰차게 거절한 서방 지도자들의 행태를 곱씹고 있을 것이다. 푸틴의 강경한 외교에 더욱 날이 설 전망이다.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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