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함을 아낀다. 상식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의외로 공이 많이 든다. 인생을 왜 그리 어렵게 사느냐고, 세상을 너무 어둡게만 보지 말라는 충고도 뒤따른다. 그러나 단언컨대, 삐딱함이 없이는 작가도 없다.
모든 삐딱함이 같은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지드래곤의 '삐딱하게'란 곡은 실연의 충격에 뒤따르는 삐딱함이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 결국에 넌 변했지/ 이유도 없어 진심이 없어/ 사랑 같은 소리 따윈 집어쳐/ 오늘밤은 삐딱하게' 가는 식이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사랑을 잃은 밤이니 얼마나 분노와 야유로 가득 찰까. 강산에의 '삐딱하게'는 사회 전체로 시선을 확대시킨다. '조금 삐딱하면 이상하게 나를 쳐다보네/ 조금 삐딱하면 손가락질하기 바쁘네.' 이렇게 사회부적응자 취급을 받더라도 올바름에 집착하지 말고 '삐딱이'로 버티며 즐기기를 권한다.
자서전을 살필 때는 읽은 시간만큼 되묻곤 한다. 거듭 강조하는 업적은 무엇인가. 끝까지 침묵하고 건너뛰는 과오나 실수는 무엇인가. 아무리 진솔한 고백이라고 해도 전부를 털어 놓진 않는 법이다. 의도적으로 감추는 차원에서 시작하여, 마음의 상처 탓에 자신도 모르게 언급하길 주저하는 차원까지 다양하다. 행간의 틈을 발견하여 채우지 않고는 그 인간의 삶이 오롯이 드러나질 않는다. 양달을 딛고서도 응달에 눈을 돌리고 어둠에 웅크려서도 빛줄기를 찾는 이가 바로 작가다.
인물의 명암을 나눠 어루만지고 대조하다 보면, 결핍에 대처하는 방식이 세 가지 정도로 갈린다. 하나는 감춤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려는 방어적인 노력이다. 또 하나는 반성이다. 부족한 부분이 왜 생겼고 그로 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가를 소상히 밝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그 동안의 노력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설명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적반하장이다. 결핍된 부분을 타인의 책임으로 돌려버리고, 자신은 상황을 판단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심판관의 자리로 옮겨 앉는 식이다. 헌법과 군령을 어기고 권력을 찬탈한 이가 '정의 사회 구현'을 주장한다든지, 독재자가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경우를 우리는 세계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공적인 발언을 왜 곧이곧대로 믿지 않느냐는 원망 섞인 불만이 들려오는 요즈음이다. 그러나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어떤 맥락에서 하느냐에 따라 다르며 어떤 행동을 병행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공직자 중에서 국민을 위하지 말자는 이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지 않는 이들의 삶을 조사하고 관찰하여 정리한 후 이야기로 담는 이가 또한 작가다. 그러므로 작가는 세상의 모든 말들을 믿지 않고 되살필 운명을 타고 났다. 이 운명의 자세가 바로 삐딱함인 것이다.
삐딱하게 들여다보면 곳곳이 의문투성이다. 환경 분야만 예로 들어보자. 이웃나라 일본은 후쿠야마 원전 사고로 방사능 오염이 심각한데, 원자력발전소를 더 짓겠다는 우리 정부의 결정이 과연 옳은 것일까. 지금부터라도 탈핵의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졸속으로 진행된 4대강 사업의 후유증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작가는 이 물음들을 하나씩 쥐고, 공명정대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겠다는 공적인 발언을 의심하며 이야기를 짜고 문장을 만든다. 정치에 관심이 많거나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작가라서가 아니라, 삐딱함으로부터 비롯된 본능적인 행보인 것이다. 좋은 게 좋다는 식의 긍정은 때론 배신을 낳지만, 삐딱함은 고통스러울지라도 당면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강산에의 노래로 돌아가 보자면, 스스로 삐딱하고자 애쓰는 자와 삐딱한 땅에 서고도 자신의 삐딱함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상반된다. 전자는 사회를 다채롭게 분석하는 시도지만 후자는 사회를 단 하나의 삐딱함으로 통일시키려는 횡포다. 어느 쪽이 터무니없으면서도 위험한지는 명백하다. 문제가 전혀 없다거나 설령 있다고 해도 해결책을 이미 세웠다고 자신하는 조직보다 더 문제인 조직은 없다. 개인과 국가도 마찬가지다.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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