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겨울 바람이 차갑던 6일 저녁 서울 도심의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54회 한국출판문화상 시상식에서 한명기 명지대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날이 추운 겨울이 되면 청나라로 끌려가던 조선인들이 떠오릅니다. 얼마나 추웠을까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조선 중기 정쟁 연구에 관심이 많은 한 교수가 이라는 책으로 출판문화상을 수상한 뒤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병자호란 후 청나라로 압송된 조선인들의 고통을 이야기한 것이다.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청이 조선을 침공한 것으로 시작했다. 조선 왕실은 청과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남한산성으로 피신했고, 47일 동안 버티다가 이듬해 1월 말 성문을 열고 나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며 군신의 의를 맺어야 했다. 이때 조선 임금 인조는 머리를 숙이는 굴욕을 경험했지만 그 추운 날 낯설고 험한 땅으로 끌려간 백성들은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한 교수는 "청의 수도 심양까지 800~900㎞를 끌려가면서 얼어 죽고, 맞아 죽고, 굶어 죽었다"는 표현으로 조선인들의 고초를 설명했다.
병자호란은 누구의 책임일까. 한 교수는 인조와 신하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확언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10여 년 전부터 침공의 조짐이 있었는데도 권력층이 막연한 낙관과 근거 없는 자신감에 사로 잡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 교수는 권력층은 언제나 전략적으로 사고해야 하며 지금도 병자호란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제질서가 급변하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그의 수상 소감은 병자호란을 예로 들며 권력층의 자세를 지적한 것이지만, 조금 넓히면 역사의 사건을 거울 삼아 비슷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제 그런 주문을 한국의 검찰에게 하고 싶다.
검찰에게 낯을 들 수 없는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일어났다.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부추겼다는 혐의로 3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한 강기훈씨가 최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검찰은 23년 전, 누구나 납득할 만한 객관적이고 명백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강씨를 범인으로 몰았다. 글씨체가 비슷하다고 했으나 설득력 없는 일방적 주장이었다. 그래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새삼 '드레퓌스 사건'을 떠올렸다.
다들 알겠지만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프랑스의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에 군사기밀을 유출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공교롭게도 그때도 스파이가 남긴 글씨체와 드레퓌스의 글씨체가 비슷하다는 것이 유죄의 근거로 사용됐다.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선고 받고 불명예 전역한 뒤 유배까지 됐다. 당시 보수 세력과 보수 언론은 드레퓌스에게 죽으라는 악담을 퍼부었다. 하지만 무죄를 확신하는 국민이 적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드레퓌스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뒤집어 씌워 없는 죄를 있는 것으로 만들었지만 언젠가 진실은 밝혀진다는 사실이 이 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한국의 검찰은 그러나 120년 전 일어난 이 역사적 사건의 교훈을 전혀 모르는 듯 하다. 그것을 알았더라면 그때 그렇게 무리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지금 재심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하겠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를 간첩으로 몰기 위해 검찰과 국정원이 출처가 불분명한 서류를 들이밀다가 들통이 났는데도 진본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은 강기훈씨 사건을 되풀이하려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100년도 더 전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지금도 많은 한국인이 입에 올린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100년도 더 지나 저 먼 곳에 있는 나라들이 21세기 한국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재연됐다고 할지 모른다. 그때 한국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나라로 조롱 받을 수도 있다.
박광희 문화부장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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