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유물인 작은 청동 인물상이다. 높이 6㎝, 폭 2.5㎝로 손가락 만하다. 구리와 주석 합금으로 주조했는데 부식이 심해 얼굴 표정이 뚜렷하지 않다. 그런데 자세와 옷차림이 특이하다. 오른팔을 높이 들어올리고 선 채 발 밑까지 내려오는 주름 치마를 입었다. 이런 자세와 복식의 유물은 국내에 유례가 없다. 이 인물은 누구이며 팔은 왜 올렸을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백제의 왕실 사찰인 부여 왕흥사 터에서 지난해 출토된 독특한 인물상을 20일 공개했다. 2000년부터 해 온 왕흥사 터 발굴의 최근 성과를 설명하는 자리에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설명회는 서울의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있었다.
불상 전문가인 강순형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은 "자세로 미뤄 석가모니를 낳고 있는 마야부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확실한 건 아니다"고 설명했다. 마야부인은 오른손을 들어 나뭇가지를 잡고 선 채 옆구리로 석가모니를 출산했다고 한다. 인도와 네팔, 중국, 일본 등의 고대 불교 조각에는 이 장면을 묘사한 작품들이 있는데,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나오거나 마야부인 옆에 따로 등장해 탄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왕흥사지 인물상에는 나뭇가지와 석가모니가 없다. 워낙 조그만 작품이라 넣기 어려웠거나, 원래 있었는데 사라졌을 가능성이 있다.
강 소장은 "밑단으로 갈수록 옷 주름이 넓게 퍼지는 주름치마는 삼국시대 불상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이고 주조 기법이나 미적인 감각도 극히 한국적"이라면서 "중국, 인도 등 외국에서 들어왔을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강 소장은 이 인물상이 왕흥사가 세워진 577년과 비슷한 6세기 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이 수수께끼의 인물은 고개는 오른쪽으로, 상체는 왼쪽으로, 하체는 다시 오른쪽으로 살짝 틀어 부드러운 S자 굴곡을 이루는, 이른바 삼곡(三曲) 자세로 서 있다. 한국 불상에 삼곡 자세가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에 와서다. 그 전에는 정면을 향해 뻣뻣하게 선 모습이었다. 후대로 갈수록 굴곡이 더 자연스럽고 풍만해진다. 얼굴은 부식이 돼서 눈, 코, 입의 윤곽이 흐릿하지만 자세히 보면 턱을 약간 쳐든 채 알 듯 모를 듯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왕흥사는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절이다. 백마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부소산성과 마주보는 자리에, 산으로 둘러싸인 가파른 비탈에 터를 잡았다. 부소산성은 백제 왕성의 후원 또는 왕성 수비 시설로 추정된다. 옛 문헌이 "왕이 매양 배를 타고 왕흥사로 왔다"고 기록해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2007년 발굴에서는 백제 사리기가 처음 출토돼 그때 딸려 나온 사리장엄구와 함께 보물로 지정됐다.
왕흥사지 발굴은 앞으로 2, 3년 더 할 계획이다. 지금까지 목탑, 금당, 강당 등 주요 가람 구조와 부속 건물지, 진입 시설, 사찰 건축에 필요한 기와를 굽던 가마 터가 확인됐다. 전체 가람 배치는 목탑 뒤에 금당, 그 뒤에 강당을 앉혀 중심 축을 이루고 그 좌우로 부속 건물이 길게 늘어선 모습이다.
작년과 재작년 발굴은 강당 터와 금당 오른편의 부속 건물 터를 조사했는데 땅 바닥에 기왓장을 세워서 촘촘히 박은 것이 발견됐다. 고대 건축 전문가인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소장은 "왕흥사 자리가 땅이 무른 습지여서 지반을 다지기 위해 기와를 깐 것으로 보인다"며 "진창을 밟지 않게 해주는 보도 블록이나 낙수에 흙이 쓸려 나가는 것을 막고 물이 빠지게 해주는 배수 시설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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