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조사 관계로 지방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초상화를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조사였는데, 후손들의 정중한 손끝을 따라 펼쳐진 초상화는 시대성과 예술성이 조화된 수준 높은 작품이라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훌륭한 작품을 조사하는 기쁨을 만끽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그날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조사가 끝난 후 조사단원들끼리 유물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한 분이 말씀하셨다. "대개 큰 집에 좋은 물건이 있지."하시며 말문을 여셨는데, 그분의 말씀을 정리하면 조상의 초상화를 제작할 경우 1점만 그리기도 하지만, 형제의 수에 맞게 그리는 경우도 많다고 하였다. 각 형제 집안에 나누어 봉안된 초상화는 후손의 형편이 어려워지면 그림이 밖으로 나오곤 하는데 큰아들의 집에서 그림을 내놓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고 대개 둘째 이하 집안의 초상화가 유통되곤 한다는 말씀이었다. 초상화에 관하여 최고의 전문성과 경험이 있는 분의 말씀이라 고맙게 잘 새겨들었다. 그러면서 '역시 장남은 다르군!'하는 생각을 하였다.
조사를 마치고 밤늦게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얕은 잠이 들었다. 반주 때문인지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 돌아다닌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살짝 떠보니 부모님과 교복 입은 큰 형님이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 잠든 척한 채 귀를 쫑긋해 듣자니, 고향에 내려가 시제 지낼 일, 형제들 학업 문제 및 여러 집안일 들에 대한 의논인데 재미없고 골치 아픈 말씀들이라 고개를 돌리자 꿈에서 깨고 말았다. 집은 좁고 가족은 많은 탓에 막내인 나는 중학교 들어갈 무렵까지 안방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냈는데 부모님과 큰 형님이 밤중에 집안 대소사를 의논하시던 모습을 잠결에 종종 볼 수 있었다. 초상화 전문가 선생님께 초상화의 유통과정과 우리의 상속제도 등에 대한 말씀을 듣다 보니 머릿속 어느 구석에 숨어있던 옛 기억이 꿈을 통해 의식 위로 떠올랐나 보다.
큰 형님과 나와의 나이 차이는 10살인데, 큰 형님은 이미 중고교 무렵부터 부모님과 집안의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였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누나, 둘째 형, 셋째 형과 집안일에 관하여 의논하시는 모습을 본 적은 거의 없다. 막내인 나는 물론이다. 불혹이 넘도록 나이를 먹은 지금도 의논의 대상이 아닌 통보의 대상일 뿐이다. 집안일에는 참여하되 그 일의 개요, 방향 등을 정확히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저 동참하는 한 사람에 불과했는데 어쩌면 그런 상황에 안도감을 느꼈다. 복잡한 제사 관계 일들, 친척 사이의 일 등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는데 막내라는 것이 핑계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다시 초상화로 돌아가 보자. 조상의 초상화를 시장에 내놓지 않았다고 해서 효자이고 초상화를 팔았다고 해서 불효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근대로의 전환기에 장남은 가업인 농사를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고, 둘째 이후는 신학문을 배우거나 출향하여 새로운 시대에 맞는 사회활동을 하다 보니 필요에 의해 초상화를 내놓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장남이 기업을 창업하고 차남 등이 고향을 지키며 사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니 이 경우를 일반화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어쨌거나 대한민국의 장남과 그 가족들이 느끼는 심리적 중압감은 여러 경로로 들려오곤 한다. 명절이나 제사가 가까워져 오면 가슴이 턱턱 막힌다는 주변 여성들의 대화, 맏며느리인 어머니의 고생이 안쓰러워 결혼 자체를 포기하고 싶다는 후배의 토로를 듣는 것은 드문 경우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자 상속제인 몽골은 유목사회이니 농경 민족들과는 다르지만, 일본은 사위가 대를 잇기도 하고 모계 쪽 성을 따르기도 한다. 중국은 재산상속에서 형제끼리 고르게 나누는 경우가 많으니 장남에게 모든 권한과 책임이 집중되는 우리와는 다르다. 여성의 권익 신장에 대한 논의는 오래 지속되었고 변화의 조짐도 있지만, 대한민국 장남이 져야 할 무게는 아직 크게 변하지 않은 느낌이다. 신ㆍ구정이 다 지나고 집안의 대소사가 대략이나마 정리되고 나니 조금은 더 처져 보이는 큰 형님의 어깨를 보며 든 생각이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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