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잠을 못잤다. 낮잠을 잔 것과 저녁에 마신 다량의 투샷 커피에 각성이 된 모양이다. 번뇌가 많은 축이라 명상과 수양에 관심은 많으나 불면은 정말이지 그물에도 안 걸리며 잘도 빠져나간다. 새벽 3시쯤 일어나 양파를 썰어 머리맡에 두었으나 냄새만 고약했다. 양떼도 수십 마리 몰아보고 우주여행도 해봤다. 아들의 숨소리를 따라 싱크로나이즈로 숨을 쉬다가 이놈이 비염이 있구나, 보약이라도 해먹여야겠네 이런 저런 생각에 또 4시를 넘겼다. 산적한 잡사도 어김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이것저것 챙기고 단도리할 일 투성이다.
창작할 때는 내 고민에 고단하고, 예술감독일 때는 단체의 비전과 창작자와의 접점을 찾느라 고단하다. 목소리를 높이면 창작자가 흔들려 눈치를 살필 것 같고, 그냥 놔두면 배가 산으로 갈 것 같아 조마조마하다. 창작자만큼의 부담감을 안고 산다. 현재 세 개의 작품을 준비하면서 희곡의 수정을 논의해야 하는데 그 조율이 마땅치가 않다. 지혜롭게 의견을 좁혀 좋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일은 정말이지 녹록치 않다.
언제더라. 내로라하는 프로덕션 작업에 참여했다가 호되게 면박을 당한 적이 있다. 제작자는 나의 스타일과 완성도에 완전히 실망했다. 미스캐스팅이었다고 후회했고 명예마저 실추되었다며 괴로워했다. 나는 연이틀을 불려갔고 휴지처럼 구겨졌다. 그런데 그 분 말씀 중에 한 문장이 또렷하다. 관리하는 자리에요. 그 말인즉슨 자기가 잘해야 되는 자리와 남이 잘하도록 이끌어야 되는 자리가 따로 있다는 것. 나는 제 자리와 역할을 못 찾고 허둥댄 셈이다. 그 말은 딱 맞았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머리를 숙였다. 될 때까지 고쳐보겠습니다, 했다. 그 분을 끝내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날까지 고치고 또 고쳤다.
그런데 나는 지금, 계속 고치고 다듬겠노라는 창작자의 말에 별로 믿음이 안가고 있는 관리하는 자리다. 오전 5시쯤 일어나 이런저런 생각에 먼지 묻은 책을 빼어들었다. 112년 전 릴케가 어느 문학청년에게 보낸 편지가 쓰윽 들어왔다.
"당신의 시에 충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떤 사람이라도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따름입니다. 심사숙고하십시오. 시를 꼭 써야 될 깊은 목소리의 근거를 찾으십시오. 그 근거가 참으로 당신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아닌지를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쓰지 않고는 죽을 도리밖에 없을 만큼 절실한 것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보다 깊은 밤 조용한 시간에 내가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인가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깊은 대답을 찾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과연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대답이 그것을 긍정하고 '나는 쓰지 않고 못 참겠다'라는 강하고 간단한 대답을 할 수 있을 때 당신은 비로소 이 필연성을 따라가야 합니다. (중략) 참으로 당신이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상실한 것을 마치 최초의 인간이란 듯이 표현하려고 노력해보십시오. 연애시는 쓰지 마십시오. 처음에는 흔히 알려진 평범한 형식을 되도록 피해야 합니다. 평범할수록 가장 어렵습니다. 훌륭하고 부분적으로 빛나는 허다한 연애시에서 독자적인 것을 이루기에는 크게 성숙된 힘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주제를 피하고 자신의 일상에서 느낀 것을 주제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슬픔이나 보람이나 스쳐가는 느낌, 어떤 미에 대한 신앙을 시로 이루십시오. 이런 것을 찬찬한 마음으로 겸손하게 성실을 다하여 시로 이루시기 바랍니다."
옛 시인은 불면 따윈 아랑곳없이 직접화법으로 나를 쏘아붙였다. 죽을 만큼 절실한가 숙고해 보자는 결론이 마치 탱크처럼 막혔던 번민을 밀어제쳤다. 창작자에게도 조언이 아닌 소통의 명분이 생겼다. 항차 세상사도 그렇지 않을까. 껍데기로 시류를 좇아 표류하다 명멸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까닭이 죽을 만큼 절실하게 탄생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오전 5시30분 쯤탈탈 털고 일어나 사우나로 떠났다. 당연히 먼동은 터올 것이었다.
고선웅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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