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2월 15일 토요일 미시(未時 13:30~15:29)는 기문(奇門) 삼기택일법(三奇擇日法)으로 보자면 길일(吉日), 길시(吉時)에 해당되는 때였다.
이날 이 시간은 다른 때와는 달리 과정에 거침이 없어 하늘에 내 뜻을 직접 알릴 수 있기에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리면 그 영험함이 일반 기도에 비해 훨씬 높게 나타난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에 좋고, 승진. 시험과 관련해서도 좋은 결과가 나타나고, 자식이 없는 경우에 득자(得子)를 위해서도 좋고, 남,여 애정운 에서도 좋으며 무엇보다도 가족의 안위를 위해 기도를 올린다면 더욱 그 효험이 높게 나타난다.
더불어, 이 날 이 시간에 발표회, 남,녀 맞선, 결혼식 등을 한다면 마가 끼지 않아 향후에 좋은 결과를 볼 수 있게 되며 그 누구를 처음 만나더라도 점차 좋은 인연으로 흐뭇하게 끝맺음을 볼 수 있는 길(吉)한 때였다.
길일 길시에는 어디에서나 기도 드려도 되지만 가급적 오래된 사찰이나 성당 혹은 오래된 교회에서 기도 드리면 그 효험이 보다 높게 나타난다.
필자도 지난 토요일 태연(泰沇) 김지유 시인의 책 한권을 곁에 끼고 삼각산 어느 정자를 찾아 책도 보고 조용히 기도도 올렸다. 좋은 때라 그랬던 건지 이 날은 따스한 햇빛이 온 몸을 휘감아 돌고 있었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의 조용한 몸부림 조차 그렇게 활기차게 보일 수 없었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과 내내 함께 있는 듯 하여 몸과 마음이 몹시 편안했었다.
역술가의 입장에서 길일 길시를 곰곰히 연구해 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특정 사주의 주인공에 있어 '중대한 변화의 기로'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나그네가 길을 걸어가다가 사거리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도 '길일 길시' 에 자신이 갈 길을 결정하는 것과 흡사하다 하겠다. 즉, 어떤 형태로건 '길일 길시'를 기점으로 삶이 변화하게 되는 계기가 나타나는데 그 경우 향후 틀림없이 그 사람은 길운의 고속도로를 타게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무엇을 하건, 어떤 사람을 만나건 이왕이면 '길일 길시'에 맞추어 행하길 권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있다. 어떤 사주의 경우 우연히 길일 길시에 누구를 만나거나, 무엇인가를 했는데 그 계기가 오히려 나쁜 결과로 나타난 경우가 있었다.
이 경우,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도에서 옳지 않은 '부정의 요소'가 내포된 경우가 많았다. 즉,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거나, 혹은 본의 아니게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되는 경우나 오히려 나에게 피해가 오게 된다면 애초에 하늘에서 막아 버리는 경우라 하겠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되지 않았다면 실망과 원망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열심히 종교활동 했었고, 기도도 열심으로 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결과만을 안겨 주는 것 입니까" 라며 신도 원망하게 되고 심지어, 그 계기로 아예 종교생활이나 기도생활도 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이는 아마도, 기도 생활이나 종교 생활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다 겪어 보았을 것이다.
이 경우 다음과 같은 시각으로 그 결과를 바라보면 어떨까 한다.
"하늘이요, 신(神)이라는 그 어떤 존재가 우리를 창조한 조물주라 한다면 그 존재는 부모요, 우리는 자식과도 같다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인 경우라면 자식이 부모에게 울며 떼쓰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요구한다면 대부분의 부모는 그 자식의 뜻대로 다 해준다. 그런데, 그 자식이 잘못된 것을 원하고 있고, 그대로 원하는 바를 해주는 바람에 오히려 자식에게 해가 미치게 될 것을 안다면 과연 어느 부모가 자식이 원한다고 해서 그것을 해주려 하겠는가. 오히려, 자식을 야단치면서 말리려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실제 사례로써, 어느 중년 부인이 아들 결혼 문제로 전화를 주셨다. 그 아들은 닭띠(酉) 였고, 결혼을 고려하고 있는 상대 여성은 용띠(辰) 였다.
그 중년 부인은 사주명리학을 어느 정도 공부하신 분이라 기본적인 납음오행 궁합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셨기에 유진(酉辰) 상합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해의 수준이 깊었다. 그 분 말씀으로는 두 남녀의 사주상 궁합도 좋았고, 실제로 애정도 깊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자쪽 집안의 반대가 너무 심해 결혼이 계속 미뤄지고 있었기에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 분은 "길일 길시에 맞춰 기도를 올렸고, 두 사람의 애정도 좋은데 왜 결혼이 이토록 어려울까요?" 라고 한숨 쉬며 물어보셨다.
필자는 "길일 길시에 기도 올렸기에 지금껏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군요. 결과적으로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두 사람의 결혼은 결국 해피엔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드리자 그 분은 화들짝 놀라시며 이유를 다그치듯 물으셨다.
"유진 상합을 논하기 이전에 기문 궁간법으로 보니 근본적으로 서로 상극에 해당됩니다. 좋은 것이 합이 되면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길함이 계속 이어지지만 이 두 사람의 궁합에서는 좋지 않은 것이 합이 되버리니 결국 흉함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상태가 평생 이어지는 것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결혼 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결혼 후에는 부부간 분란이 잦아지고, 자식이 좋지 않고, 남편은 집에 들어가면 항상 고드름이 끼여 있는 것 같이 차가움과 외로움을 느끼게 되고, 아내는 같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상태가 되어 버리는데 서로 상합이니 떨어질래야 떨어지지 못해 이혼도 잘 되지를 않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위 경우에서, 두 남녀는 종교심이 매우 깊은 경우에 해당되므로 결혼 후 어느 정도는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 하겠으나 근본적으로는 결혼 성사도 어렵고, 설령 되더라도 결혼 생활이 평탄하지 않음은 분명했다.
누구나, 특히 종교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내가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지난 56회 칼럼의 제목처럼 '신은 쎄디스트' 라며 하늘을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하는 바가 나쁜 결과가 나타나는 경우라면 오히려 안된 것이 천만 다행일 것이니 그 경우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 받은 것이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지난 토요일 길일 길시는 은둔생활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 필자 자신에게도 약간이나마 변화의 기운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시간이었다.누구나 변화는 흥분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두려움도 함께 따를 수 밖에 없는데 필자 역시도 그러한 것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역술인 부경(赴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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