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바겐 비틀은 정말 포르쉐 박사의 아이디어였을까?
딱정벌레 같은 모양으로 널리 알려진 폴크스바겐의 간판 '비틀'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000만대 이상 생산된 명차 중 하나다. 또한 아돌프 히틀러의 뜻에 따라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설계한 국민차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비틀 하면 포르쉐 박사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그렇다면 비틀은 과연 포르쉐 박사의 아이디어로부터 나온 창작물일까?
포르쉐 박사가 국민차 개발을 시작한 것은 1934년이었고, 첫 시제품 비틀을 만든 것은 1938년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비슷한 설계와 모습을 지닌 차들이 여럿 나와 있었다. 1933년에 등장한 '슈탄다르트 주페리오'가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이 차는 또 다른 기술자인 요제프 간츠의 설계가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일찍이 누구나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국민차를 꿈꾸었다. 그러나 직접 차를 만들 능력이 없어 설계를 공개했고, 이를 참고해 만든 차가 주페리오다.
메르세데스-벤츠도 같은 시기에 '비틀'을 닮은 여러 차를 시험 제작했다. 특히 1936년에 나온 '170H'는 비틀과 아주 비슷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두 차가 비슷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포르쉐 박사는 1923년부터 1932년까지 이 회사의 선임 기술자였고, 170H는 그가 재직 중일 때 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170H는 대량 생산되기도 했지만 국민차가 되기에는 값이 너무 비쌌고, 인기가 없어 오래지 않아 생산이 중단되었다.
비틀에 가장 큰 영감을 준 차로는 체코(당시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타트라 V570'을 들 수 있다. 이 차는 히틀러가 시승하고 무척 만족할 정도로 뛰어났다. 타트라에 대한 히틀러의 호평을 들은 포르쉐 박사는 그 설계를 참고해 비틀에 반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중에 타트라는 설계 도용을 이유로 소송을 걸지만, 히틀러는 원만한 해결 대신 체코를 침공해 점령하는 극단적 대응으로 맞섰다. 소송은 2차 대전이 끝난 뒤에 재개되었는데, 1961년에 결국 폴크스바겐은 타트라 측에 거액의 합의금을 물어주면서 긴 공방을 결말지었다.
이와 같은 여러 사례를 종합하면, 비틀이 포르쉐 박사의 순수한 창작물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실제로 1930년대 초에는 여러 설계자들이 엔진을 뒤에 놓고, 공기 역학을 고려한 둥근 차체를 얹은 소형차를 다양하게 선보였다. 포르쉐 박사 역시 이런 흐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에다 히틀러의 희망사항, 더불어 당시 최신의 자동차 유행을 반영해 비틀을 만들었던 것이다.
류청희 자동차칼럼니스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