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 대필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강기훈씨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23년 전 그날. 1991년 5월 8일. 사건 기자였던 필자는 이른 아침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누군가 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했다는 제보를 받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현장에는 시커먼 자국만 남아있고 유류품은 깨끗이 치워진 상태였다. 재야단체인 전민련 간부 김기설씨는 "노태우 정권 퇴진하라"는 구호를 외친 뒤 분신했고 목격자는 없었다.
파장은 컸다. 열흘 전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시위 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뒤 정권의 탄압에 항의하는 학생과 노동자의 분신과 투신이 잇따르던 때였다. 며칠 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김지하씨의 운동권 비판 칼럼이 나오고 서강대 총장 박홍씨는 "분신에 배후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연이어 안기부와 검찰이 분신 배후를 수사하겠다고 밝히더니 며칠 뒤 강씨가 유서를 대필했다는 발표가 나왔다. 강씨는 명동성당에 들어가 농성하며 검찰과 진위 공방을 벌였다. 강씨가 자진 출두할 때까지 한 달간 그와 주변 취재를 통해 유서 대필은 없었다는 확신을 가졌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단서를 찾지 못해 기자로서의 무력감에 시달렸고 지금까지 응어리로 남아있다.
정통성이 부족한 6공 정권은 대학생들의 시위와 분신이 잇따르자 공안정국 조성에 나서 급기야 유서 대필이라는 해괴한 사건을 만들어냈다. 합리적 사고와 상식은 설 자리가 없었다. 검찰은 정권의 요구에 부응해 무리하게 필적 감정과 기소를 몰아붙였다. 법과 정의의 편에 서야 할 법원은 진실에 눈 감았다. 다시 들춰본 대법원 판결문은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공소사실에 1991.4.27일부터 같은 해 5.8일까지의 어느 날 서울 어느 곳에서로 돼있고, 유서 작성의 방법에 관하여 구체적인 기재가 없다 하더라도, …그 유서가 압수돼 특정돼 있는 경우,…현장부재 등의 증명 또는 방어권 행사에 장애를 초래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대필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해도 '대필 유서'가 있으니까 문제될 게 없다는 황당한 논리였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을 시간이 흘렀는데 요즘 정국에서 그때를 보는 듯한 데자뷰가 느껴진다. 비판ㆍ반대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무차별적인'종북몰이'가 횡행한다. 국가기관 대선개입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정권이 검찰과 국가정보원을 동원해 총력전에 나선 것도 비슷한 양상이다.
탈북자 출신의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를 조작된 서류로 간첩으로 내몰려 한 사건은 멀쩡한 젊은이를 유서 대필범으로 올가미를 씌운 것과 같은 수법이다. 1심 재판 때도 증인을 상대로 한 자백 강요와 허위자료 제출로 한 차례 망신을 당했다. 그런데도 다시 조작된 서류를 제출한 국정원과 검찰에게서 용공조작의 망령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어제 내란 음모 유죄 판결을 받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사건도 공안정국의 한가운데 터져 나왔다. 국정원 대선개입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전국을 뒤덮던 시기였다. 현역 의원의 신분으로 시대착오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그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과연 철저한 법 논리에 따른 판단이었는지 의구심이 든다. 내란 음모는 봉건왕조시대 대역죄, 또는 모반죄라고 불리던 무시무시한 범죄다. 이런 엄청난 일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것도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아이들 우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모의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간다. 이 시대에 총을 개조하고 사제폭탄을 만들어 통신시설을 마비시키고 유조창 탱크를 폭파시키는 게 가능하다고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내란을 음모하고 선동했다는 그의 말이 나라를 뒤집어 엎을 정도로 위험하고, 우리 민주주의 체제가 그 정도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허약하다는 데 동의하기 어렵다.
유서 대필이 상식의 영역에서 이해가 가지 않았듯이 내란 음모를 인정하기 어려운 것 역시 상식의 차원이다.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을 비판하면서 쓴 에서 "프랑스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고 한탄했다. 질식할 듯한 공안정국을 보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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