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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대륙의 작은 거인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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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대륙의 작은 거인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입력
2014.02.1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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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2월 19일 오후 9시, 중국 최고지도자이자 개혁개방의 설계자였던 덩샤오핑이 향년 93세를 일기로 베이징의 군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150cm 남짓한 땅딸막한 키에 찢어진 눈과 흘러내릴 듯한 볼 살을 지닌 평범한 노인이었지만 그가 남긴 정책은 미국과 주요 2개국(G2)을 형성하며 21세기 경제 강국으로 도약하는 중국대륙의 토대가 됐다.

1904년 중국 쓰촨성에서 태어난 덩샤오핑은 16세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그가 평생의 신념으로 삼은 칼 마르크스를 알게 됐고, 33년부터 중국공산당 창시자인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하면서 항일투쟁과 대장정을 함께했다. 49년 장강 도하작전과 난징 점령을 지휘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커다란 공을 세운 덩은 이후 마오의 총애를 받으며 정무원부총리와 정치국위원을 역임하며 정치인으로 급성장했다.

1966년, 승승장구하던 그의 정치인생에 위기가 찾아왔다. 산업화 대약진운동에 실패한 마오쩌둥은 덩샤오핑과 류사오치(劉少奇) 등 수정론자들의 공세가 이어지자 이른바 4인방이라 일컬어지는 부인 장칭(江靑)과 왕훙원(王洪元)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을 앞세워'문화대혁명'을 단행한다. 4인방과 함께 학생 전위대였던 홍위병을 필두로 10여 년 동안 계속된 이 운동은 극좌 사회주의로 번지며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통해 반대파들을 제거했고, 정치 경제적 견해를 달리한 덩도 하루아침에 모든 권력을 잃고 유배지에서 연금상태로 지내야 했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권력을 넘겨받은 화궈펑(華國鋒)은 정국 수습을 위해 장칭을 버리고 덩샤오핑을 선택했다. 숙청 여파로 죽음을 면치 못한 류사오치와 달리 공산당원자격을 유지했던 덩은 정치를 재개할 수 있었고 이후 화궈펑과의 5년 경쟁 끝에 81년 공산당 중앙군사위주석에 오르며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으로 요약되는 그의 경제 정책은 부유해질 수 있는 사람부터 부자가 되라는 선부론(先富論)과 함께 80년대 중국식 시장경제를 대표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고 이러한 개혁개방정책에 힘입어 중국은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거듭했다.

1979년 중국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해 지미 카터 대통령과 다섯 차례의 회담을 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84년에는 대처 영국총리와 만나 홍콩 반환문제를 매듭지었다.

1989년 4월 톈안먼(天安門) 사태에 책임을 지고 장쩌민(江澤民)에게 권력을 이양하며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오뚝이라 불리는 그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개방정책을 더욱 공고히 했고 은퇴 후에도 가족과 함께 건강한 삶을 영위하다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젊은 지도자 양성에 앞장섰고 장쩌민 이후 후진타오와 시진핑이 중국 최고지도자 자리를 계승하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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