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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일본 화폐서도 잊혀진 이토 히로부미… 묘지 방문객 연 1000명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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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일본 화폐서도 잊혀진 이토 히로부미… 묘지 방문객 연 1000명도 안 돼

입력
2014.02.1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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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오전 중국 하얼빈역, 수 차례의 총성과 함께 일본의 초대 총리와 대한제국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추밀원 의장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를 저격한 조선 청년 안중근은 현장에서 붙잡혔고,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아 5개월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두 사람의 사후 운명은 극명하게 갈렸다. 일본군은 안중근을 사형한 직후 사체를 유기했고, 지금까지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반면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른 뒤 도쿄시내에 5,000㎡ 부지를 마련, 성대한 묘역을 조성했다.

지난 달 안중근 기념관이 중국 하얼빈에서 개관한 뒤 한중 양국에서 유례없는 안중근 열풍이 일고 있는 가운데 도쿄 시나가와(品川)구 니시오이(西大井)에 위치한 이토 히로부미 묘지를 찾았다. 전철 니시오이역에서 멀지 않지만 철길을 지나야 하고 주택가 좁은 골목길을 거쳐야 해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니시오이 역 근처에서 만난 주민에게 길을 물으며 안중근에 대해 아느냐 물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인물이라는 정도를 배웠을 뿐 상세한 내용은 모른다"고 답했다.

이토 히로부미 묘지는 평소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다. 그가 사망한 10월 26일에만 한시적으로 개방하는데, 이 기간 우익 인사들이 대거 방문한다고 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초인종을 눌렀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며 취재를 요청했다. 묘지 관리인인 모토다 야스코(許田靖子)가 나와 문을 열어줬다.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묘지를 돌보고 있다고 한다. 그는 묘지 가까이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취재를 허락했다.

묘역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당초 도쿄도가 묘지 부지로 5,000㎡을 매입했으나 현재 묘역 소유주인 야마구치현 출신 유지들이 그 땅의 절반 이상을 매각해버렸다. 이들이 판 땅에 아파트와 주택들이 들어서, 묘역은 상대적으로 더욱 초라해 보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흉상 주변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석물들도 즐비했다. 일본 신사의 입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도리이(鳥居ㆍ두개의 기둥에 지붕을 올린 문)도 눈에 띄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신격화하려던 의도로 보인다.

철문을 지탱하는 기둥도 원래는 도리이였다고 한다. 모토다에 따르면 1922년 간토 대지진 당시 도리이가 쓰러졌다. 이후 부서진 도리이는 한동안 방치돼 있다가 깨진 밑부분을 톱으로 잘라낸 뒤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묘지 방문객은 1년에 400~500명 남짓이며 많아도 1,000명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간혹 한국에서 교육관련 학자와 유학생이 찾긴 하지만 그 수도 많지 않다.

시나가와구는 묘역을 구지정 사적(19호)과 시나가와구 100경(景)으로 지정하고 안내판 등을 설치했지만 학생들의 역사교육현장으로 활용하지는 않고 있다.

안내판은 이토 히로부미를 조슈반(현재의 야마구치현)의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메이지 신정부에서 요직을 지내며 내각제도의 기초를 다진 인물로 묘사했다. 안내판은 "조선의 독립운동가에게 저격 당해 69세로 숨졌다"라는 문장으로 끝맺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안중근을 범죄자나 테러리스트로 규정했지만 안중근이 쏜 총탄에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 본인의 묘지조차도 안중근은 단순한 범죄자가 아님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도고 가즈히코(東鄕和彦) 교토산업대 교수는 "그것이 일본이 안중근을 바라보는 정확한 시각"이라며 "안중근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테러리스트 운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초대 총리를 암살한 테러리스트 안중근에 대한 재해석작업이 본격화한 것은 1970,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각종 사료를 통해 안중근이 뛰어난 인품과 식견을 가진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일본이 행한 제국주의적 만행까지도 함께 속속 드러났다. 일본내 양심적인 학자들 덕분에 당초 안내판에 폭한으로 묘사됐던 안중근은 독립운동가라는 위치를 찾았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현재의 평가는 그다지 후하지 않다. 그는 일본의 1,000엔짜리 지폐에 두 차례나 등장했으나 1984년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夏目金之助)에게 자리를 내준 뒤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안중근에 대한 재평가가 붐을 이룬 뒤 지폐 인물로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반영됐다는 해석도 있다.

나카카와 세이잔(中川聖山)이 펴낸 사진집 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영웅호색이라는 말처럼 여자관계에 대한 에피소드도 많고 추잡한 이야기도 많이 전한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또 처세술의 천재로, 그가 총리가 된 것은 자신을 모자라는 인물인 것처럼 보여 주변의 선배를 돋보이게 하는 능력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도쿄=한창만특파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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