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40만m2 부지에 첫 삽77년 수출 1억불 한강의 기적 일궈"부모·남동생·오빠 위해…"기본권 조차 억눌렸던 여공들파업과 저항 노동운동 움틔워한국경제 반세기 압축판정치·문화·영화의 모티브 역할도
구로공단은 우리나라 제1호 국가지정 산업공단이다. 하지만 구로공단의 의미는 공장들이 밀집된 장소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산업화 과정이 말해주듯, 구로에는 정치와 경제와 문화가 있었다. 2000년 이후 디지털산업단지로 개명돼 지금은 누구도 이곳을 구로공단이라 부르지 않지만 50년을 맞은 구로의 역사는 번영과 갈등으로 점철된 한국현대사의 축약판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
구로의 탄생
"재일교포들의 재산과 기술을 들여와 서울 근교에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지역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수출을 통해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키는 길입니다."
1964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지시로 일본의 수출산업현황을 살펴보고 돌아온 이원만 한국나이론공업협회장(코오롱 창업주)은 이렇게 보고했다. 그리고 이 회장을 비롯한 기업인 16명은 같은 해 8월 산업단지조성을 위한 민간추진기구로 사단법인 한국수출산업공단을 발족했고, 정부는 이어 '수출산업공단단지개발조성법'을 제정했다. 이 법을 토대로 만들어진 첫 국가산업단지가 바로 구로공단이다.
이듬해 3월 구로동일대 약 40만㎡ 부지에 첫 삽을 떴다. 67년 공사가 마무리됐지만, 31개 입주회사 중 수출실적이 있는 곳은 5곳뿐이었다. 그 해 수출은 목표액 500만 달러에 턱없이 모자란 112만 달러에 그쳤다. 정부는 관련규제를 풀어 대기업에 대해서도 공단입주를 허용했다. 2공단(69년), 3공단(73년)의 부지분양이 끝나면서 가산동과 구로동 일대 약 198㎡에 걸친 구로공단의 겉모습이 완성됐다. 당시 구로공단은 ▦섬유ㆍ봉제 29개 ▦전기ㆍ전자 25개 ▦잡화 18개 ▦조립금속 14개 ▦완구 6개 ▦가발 3개 등 전형적인 노동집약적 경공업 수출단지였다.
구로의 경제학
구로공단은 '수출입국'의 첨병이었다. 70년대 정부의 수출드라이브가 본격화되면서 구로공단은 빠른 속도로 몸집을 불렸다. 77년에는 처음으로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하며 국가 전체 수출의 10%를 차지했다. 70년대 구로공단의 연 평균 수출 증가율은 36.5%. 69년 3,1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수출액은 80년 18억7,000만 달러로 60배 이상 껑충 뛰었다.
구로의 수출경쟁력은 노동력에서 나왔다. 값싸고 풍부한, 그러면서 근면성실하고 순종적인 여공들이야말로 자본도 기술도 없이 오로지 낮은 가격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경제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엔 제격이었다. 78년 구로공단 노동자는 무려 11만4,000명에 달했다. 고도성장의 원동력이 수출이라면,'한강의 기적'은 구로공단 여공들이 만들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공단에도 부침은 있었다. 70년대말~80년대초 오일쇼크 때는 수많은 입주기업들이 문을 닫았고, 80년대 후반 3저(저금리-저유가-달러약세) 호황 땐 공단도 함께 번성했다. 한국경제가 살면 구로공단도 살고, 한국경제가 위축되면 구로도 함께 시드는 구조였다.
노동집약형 성장시대의 종말은 곧 구로공단의 종말이었다. 90년대 이후 임금상승으로 가격경쟁력 유지가 한계에 도달하자, 한국경제의 성장 축은 경공업에서 첨단IT산업 위주로 옮겨갔다. 구로의 기업들도 값싼 해외로 공장을 옮기거나 문을 닫아야 했다. 90년 40억 달러였던 수출액은 99년 15억 달러로, 고용 인원도 5만5,000명에서 2만9,000명로 줄었다.
지금 누구도 구로를 공단이라 부르지 않는다. 모두들 디지털(G)-밸리라고 부른다.
구로와 여공
74년 한국수출산업공단이 구로공단 탄생 10돌을 기념해 만든 상징물은 '횃불을 들고 있는 여공'이었다. 구로의 힘은 여공에서 나왔다.
왜 하필 여공이었을까. 여기엔 경제적, 관습적 배경이 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생존을 위해선 서울로 와야 했다. 이른바 이촌향도(離村向都). 하지만 남존여비의 오랜 관습은 '아들은 진학, 딸은 취업'이란 공식을 만들어 냈고, 수많은 시골의 어린 딸들은 부모님을 위해 오빠와 남동생을 위해 구로공단의 문을 두드려야 했다. 회사입장에서도 고분고분하면서, 인건비가 좀 더 싼 여공을 선호했다.
하지만 처우나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77년 당시 경력 3년 차 여공의 경우, 아침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일하고 월급 2만2,000원(초과수당 3,000원)을 받은 게 전부였다. 그나마 고향에 한 푼이라도 더 보내려면 안 먹고 안 써야 했다. '벌집촌'의 방 한 칸에 4~6명이 모여 살거나, 심지어 주간조와 야간조가 방을 나눠 쓰는 '이부제 셋방'도 있었다. '라보때(라면으로 보통 때운다)'란 유행어까지 나왔다.
구로의 정치학
쌓이고 쌓이면 결국은 터지는 법. 기본권은 존재하지도 않는 노동현실은 구로를 '노동운동의 메카'로 만들었다. 70년 전태일씨 분신 이후 대학생과 종교인, 재야운동가 등 지식인들은 구로공단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노동운동은 유신에 대한 반독재투쟁과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구로공단 전반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종교인들의 산업선교, 대학생들의 야학을 통해 구로의 여공들도 현실에 눈을 뜨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일부 대학생들은 위장취업을 통해 산업현장으로 파고 들어갔고, 곳곳에서 노조설립이 시도됐다. 하지만 독재정권은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수출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었던 데다, 정치적으론 정권유지를 위해 강도 높은 탄압으로 일관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결합돼 더욱 세를 넓혀갔다. 85년 6월 대우어패럴 노조간부 구속을 계기로 효성물산, 대우어패럴, 가리봉전자, 부흥사, 눈코리아 등이 우리나라 역사상 첫 노동자 동맹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95년 민주노총 결성에 이어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등 구로에서 움튼 노동운동은 본격적인 정치세력화로 이어지게 됐다.
구로는 많은 정치인도 배출했다. 비록 지금은 여야로 갈라졌지만, 심상정 진보정의당 대표, 김문수 경기도 지사, 원희룡 전 새누리당 의원 등은 서울대 재학시절 그리고 졸업 후에도 야학과 취업투쟁 등을 통해 구로의 역사를 공유했던 인사들이다.
구로와 문화
사람이 있는 곳엔 문화가 존재한다. 구로공단처럼 역사와 상징이 짙은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구로공단은 우리나라 '노동문학'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구로를 통해 고도성장, 수출입국으로 포장된 한국사회의 속살을 보려는 문화적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노동자들이 직접 글을 쓰기도 하고, 일부 문학인들은 글을 쓰기 위해 노동자가 되기도 했다. 노동자 출신 송경동 시인은 "해방 이후 민족문학이 주류를 이뤘고 민중문학이 그 뒤를 이었다. 이후 많은 이들이 노동자라는 사회적 계급의 삶과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구체화 하는 과정에서 노동문학이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신경숙의 (1994), 공지영의 (1988) 박노해의 (1984) 등 문학작품과 (1980), (1987), (1989), (1994), (1999), (2000), (2005) 등 영화들은 모두 구로공단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정예원 인턴기자(국민대 일본지역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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