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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이라도 좋아 단답형 이라도 좋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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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4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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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32)의 소설은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씌어졌다, 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외로움의 원인은 다종다양하다. 그러나 그것의 형식은 언제나 동일하다: 소통 불가. 2011년 등단 이후 발표한 아홉 편의 단편을 묶은 첫 소설집 에서 그는 언어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전적 미학을 매끄럽게 구현해낸 서사를 통해 '결국은 소통할 수 없음'과 '그래도 소통하려 할 수밖에 없음'을 잔잔하고 애달픈 어조로 설득해낸다.

책에 묶인 작품 중 많은 단편들이 외국의 도시에서 외국어로 힘겹게 소통을 시도하는 유학생이거나 한국어를 배우러 온 교포 혹은 외국인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소통이라는 주제에 강하게 사로잡힌 작가가 외국어와 외국의 공간을 불러들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작가 자신이 불문학을 전공한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 자체가 결국 홀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인간조건에 유비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가에게 언어는 "나를 할퀴고 지나가는 것"('꽃 피는 밤이 오면')이며, 그는 이미 "한두 문장으로 요약한 타인의 삶이 얼마나 진부해질 수 있는가"('거짓말 연습')를 알고 있다.

소설집의 가장 아름다운 단편이자 등단작인 '거짓말 연습'의 주인공은 다른 여자와 잤다고 털어놓은 남편과 2년간 별거한 후 홀연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어학연수 중인 그는 외로운 노인들과 외국학생들을 연결해주는 지역 언어교환 프로그램에 참여해 청력이 좋지 않은 노부인 르블랑과 매주 만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둘은 TV나 켜놓고 앉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만들 수 있는 문장이 곧 나의 의견이 되"는 외국어 속에서 불편함과 편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내 어머니의 직업은 교사입니다, 따위의 어학교재 속 문장들. …상대가 결코 확인할 수 없는 거짓말들. 교재 속에서 찾아낸 판에 박힌 문장들로 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이상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없다는 점이 내게는 안심이었다."

"너네 별거한다며?" 음식을 입에 넣으며 심상히 묻던 고국의 친구로 인해 '나'는 이미 예전에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무수한 시간들이, 기억들이, 몸짓들이, 지극히 통속적인 한 문장으로 완결"될 뿐임을 깨달은 바 있다. 진실한 모국어의 폭력성이다.

그러나 유학생 중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던 '나'는 르블랑 부인과의 마지막 만남의 날 이후 변화한다. 파이를 구워놓은 부인은 '오늘. 생일. 죽음. 아들'이라는 단어만을 알아들을 수 있는 어떤 고백을 한다. 2차 세계대전, 고작 두 살이었던 아이가 부인의 품 안에서 폭격으로 죽었다는 것. 이어 한국어로 남편과의 일을 쏟아내는 '나'를 르블랑 부인은 "다 알아들었다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기숙사에서 열린 각국 유학생들의 마지막 저녁식사. "우리는 형용사나 부사, 은유나 상징이 제거된 가장 단순한 구조의 문장으로만 의사소통을 했다. …나는 내가 느끼는 미묘한 감정들을, 사소한 차이들을 결코 제대로 전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여기, 우리의 대화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에 진실한 것이 하나라도 존재했다면 그것은 다만 우리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행위, 그것뿐이었을 것이다."(195쪽) 얼굴조차 모르는 아빠에 대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댔던 엄마는 "어쩌면 거짓말이야말로 가장 건전한 소통방식"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연애 한번 못해본 30대 한국어 여성 강사가 짝사랑하게 된 재미교포 학생 폴에게서 듣게 된 갈등과 화해의 '한인 가족 서사'는 "삶이란 신파와 진부, 통속과 전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말해질 수밖에 없는 것들에 의해 지속되는 것"임을 보여주며('폴링 인 폴'), 홀로 '감자'를 '개'의 의미로 사용해왔음을 깨닫게 된 여성이 겪는 혼돈과 고독은 "내가 발설하는 문장들이 투명하게 전달되리라는 믿음"이 애당초 가능하지 않음을 알레고리화한다('감자의 실종').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듬더듬 말해야만 한다. 방송 프로그램의 녹취록 푸는 일을 부업으로 하는 아내는 정리해고를 피하기 위해 과로하다 쓰러져 뜻 모를 말만 중얼거리는 남편의 "외국어보다 낯선 문장"들을 자판으로 기록한다('꽃 피는 밤이 오면'). "발버둥치는 육체도, 죽음도 온전히 나만의 몫이라는 사실이 두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는 결코 살아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백수린의 소설에서 신인을 돋보이게 하는 새로움이라거나 파격을 찾기는 어렵다. 서사의 결이 곱고 촘촘한 그의 소설은 그래서 고전적 의미에서 잘 빚어졌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어떤 신진작가가 더없이 안정된 기량으로 독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면, 그는 머잖아 '물건'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거짓말 연습' 하나로도 이 덕담은 능히 증명된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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