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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조선 환심 사려 대한제국 재판제도 손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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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조선 환심 사려 대한제국 재판제도 손댔다

입력
2014.02.1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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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는 재판제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재판제도가 불안전하다."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 체결 이듬해(1906년) 초대 조선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한 말이다.

일제 침략이 없었으면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 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이른바 '내재적 발전론'이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근대사 연구에서 주종을 이루었다. 하지만 도면회(54)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반기를 든다.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에 서면 일본의 대한제국 식민지화가 일제의 침략 야욕과 압도적 군사력 때문이라는 유치한 답으로 귀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일본 제국주의라는 '외부'가 아닌 재판제도의 보수반동화 등 '내부'에서 식민지화의 원인을 찾았다. 그가 대한제국 화폐 금융 연구를 통해 한국 사회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을 추적했다가 한계에 봉착한 경험도 작용했다.

'대한제국 황제와 고위 관료, 한때 2만여명에 달했던 조선군은 어째서 총 한 방 제대로 쏘지 못한 채 권력을 빼앗겼거나 무장해제를 당했을까. 국가 멸망을 앞에 두고 어째서 양반 유생층 일부만 의병투쟁에 나섰을까. 전국적 반일 항쟁은 왜 일어나지 않았을까.'

도 교수가 1983년 서울대 국사학과 대학원에 다니던 시절부터 품었던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라는 결과물로 31년 만에 내놓았다. 그는 답을 제시하기 위해 갑오개혁(1894) 이전, 즉 조선 후기 형사재판제도의 구조와 성격을 분석하고 갑오개혁 당시 어떤 근대적 형사재판제도가 만들어졌는지, 전제군주제 수립 이후 형사재판제도가 어떻게 보수화했는지를 살핀다.

갑오개혁기 조선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고소ㆍ고발권 확대, 피의자 체포 차별 폐지, 체포영장제 도입 등의 내용을 담은 근대적 재판제도를 수립했다. 양반을 우대하던 재판 절차가 대부분 혁파되고 백성은 법 앞에 동등한 존재가 됐다. 독립협회 운동기에는 고급 관료나 지방관을 고소ㆍ고발해 처벌받게 하는 등 조선 신분제가 깨져 나갔다. 일반 백성은 왕이나 대신에게 뇌물을 바치고 부임한 관찰사와 군수의 수탈에 대한 억울함을 재판을 통해 풀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근대 국가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독립협회 운동(1896~1898)이 좌절되고 고종 황제의 전제정치가 확고해진 1899년 이후 재판기관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을 도리어 처벌하는 지배계급의 통치수단으로 회귀했다. 수령이 제멋대로 판결하는 '원님 재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독립신문이 1899년 10월 사설을 통해 '사람을 차별대우하고 죄형법정주의가 무시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비판하는 등 독립신문과 황성신문 등에 관찰사와 군수 등 지방 관리들이 재판권을 악용해 국민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보도가 잇따랐다.

이에 따라 일부 백성이 러ㆍ일전쟁(1904~1905) 이후 한반도에 주둔한 일본군사령부나 일본공사관에 "학정을 일삼는 지방관을 처벌해 달라"고 호소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 실제로 일본이 대한제국에 외교적 압력을 넣어 탐관오리가 처벌되기도 했다. 해결사 노릇을 하는 일본에 조선 백성은 환심을 갖게 된다. 을사조약에 반대하던 일부 개화파 지식인을 포함해 적잖은 백성이 일본의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과 조선통감부의 '시정 개선' 정책에 기대를 걸게 됐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열악한 조선 사법제도의 실태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재판제도 개혁에 최우선으로 나서 그 수준을 일본이나 서양 열강과 비슷하게 끌어올렸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관찰사, 군수 등 지방관이 재판권을 이용해 백성을 수탈했기에 재판제도를 개혁하면 조선 백성이 일본의 통치에 호감과 지지를 보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한국을 독점 지배하려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열강의 조선 치외법권을 폐지해야 했다. 치외법권을 폐지하지 않으면 열강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간섭할 소지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저자는 "갑오개혁기 근대적으로 개혁된 형사재판제도가 대한제국기에 보수반동화함으로써 백성의 생명과 권리를 지켜주지 못한 결과 일제의 재판제도 개혁이 한국인에게 상당한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며 "이는 '자주적 근대'와 '식민지적 근대'에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단절보다 연속성이 있음이 드러낸다"고 강조했다.

이 책은 법학이나 법제사적 분석에만 한정하지 않고 개화기 조선의 정치 투쟁과 사회 갈등을 중심에 놓고 형사재판제도의 변화를 분석했다는 점에서 노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저자도 털어놓았듯 형사재판제도에만 초점을 맞춰 식민지화의 원인을 총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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