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탄생'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유발한 사회·경제적 진보 낱낱이 소개'책과 혁명'계몽사상서보다 포르노그래피가 민중 자극… "구체제 전복의 힘"
1792년 9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이 프랑스 국경에 주둔하고 파리 입법의회가 수명을 다한 격동의 날, 프로이센의 남작 아나카르시스 클루츠가 의회 연단에 올랐다. 유럽의 근대사를 다시 쓰기 시작한 엄중한 시점에서 이 남자는 수백 년 전 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를 향해 찬사를 쏟아낸다. "신이 내린 인간 구텐베르크에 대한 팡테옹(만신전)의 영예를 부탁 드립니다. 그는 신을 대신해 '빛이 생기리라'라고 말했고, 이에 빛이 생겼습니다. 최초의 혁명적 인간, 그의 손에서 세상을 쇄신하는 끈을 찾아냈습니다"( 564쪽)
계몽주의와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으로 상징되는 18, 19세기 유럽은 서구 중심의 현대사가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양분을 채운 모태의 시간이었다. 이 세 사건이 응축된 18세기 말 혁명의 현장에서 느닷없이 구텐베르크를 향해 경배를 쏟아낸 이 남자의 웅변은 "인쇄술의 발명과 이로 인한 책의 대중화가 근ㆍ현대 유럽 문화를 천지개벽과 같이 움직였다"는 역사의 진술을 대변한다.
책의 출현(정확히 말해 인쇄본의 탄생)이 가져온 시대의 변화, 인쇄술이라 불리는 희대의 기술이 유발한 사회경제적 혁신과 진보를 낱낱이 그려낸, 그리고 그 발돋움의 바닥에 깔린 에너지를 '금서(禁書)의 사회학'으로 풀어낸 두 권의 명저가 동시에 번역됐다. 프랑스 아날학파(사회구조를 역사인식의 골격으로 보는 학파)의 창시자인 뤼시앵 페브르와 그의 제자로 도서관학ㆍ문헌학자인 앙리 장 마르탱이 1958년 프랑스에서 초판을 낸 , 그리고 의 출간으로 본격화한 책의 역사에 대한 연구와 저작의 큰 흐름 속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서양사학자인 로버트 단턴이 1996년 펴낸 역작 이다.
은 원래 프랑스의 저명한 역사가이며 철학자인 앙리 베르가 기획한 '인류의 진화' 총서 시리즈 가운데 제 49권에 해당하는데 베르의 뜻이 페브르에게 건네진 것은 1930년경이었다. 인류의 가장 큰 발명인 책의 모든 것을 담은 저작의 집필은 이후 25년 넘게 이어졌다. 페브르가 타계(1956년)한 후에도 장 마르탱의 퇴고와 핵심을 추리는 요약(제8장)이 3년여 동안 더해졌다. 책은 인쇄술이라는 혁명적 과학기술의 역사를 추적하는데 방점을 찍지 않는다. 대신 사회변화상을 이해하기 위해 앞 부분에서 활판인쇄술 발명 이전 오래도록 애용된 목판술, 그리고 모든 면에서 유럽을 앞섰던 중국의 인쇄 상황을 소개한다. 더불어 "판각본은 훼손되기 쉬워 많은 책을 간행하기 어려우니 동활자로 서적을 널리 전파해 무궁한 이로움을 삼겠다"고 한 1403년 조선 태종의 칙령을 소개해 우리나라의 당시 활판인쇄 수준을 독자들이 가늠케 한다. 나아가 식자층에 제한된 고가품에서 벗어나 기술서와 문학서로 영역을 넓힌 대중 상품으로서의 책이 어떻게 중세 유럽에서 유통되었는지, 당대 출판을 위한 제반 비용 등을 정밀한 자료조사를 토대로 보여줘 사회경제사의 전범이라 할 만하다. 소위 팔리는 책을 판매하려 애쓰는 출판업자의 모습, 필터는 다르지만 역시 현대사회와 마찬가지로 검열의 그물이 널리 지식사회를 덮고 있던 풍경 등이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 책은 인쇄술의 발달과 보급, 그리고 출판업자들이 근대 사회 진보의 최대 동력이었다는 결론을 보여주겠다는 진부할 수 있는 기획 의도 아래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의미보다 사회구조를 겨냥한 관찰의 눈으로 역사를 읽어내는 아날학파의 수장답게 저자는 중세 유럽이라는 거대한 뼈대 곳곳에 붙어있는, 출판으로 대표되며 인류의 지적 행동이라 불리는 살점들을 촘촘히 발라냈다. 서구 유럽 국가들의 모국어 기틀을 인쇄 출판의 발달이 바로 세운 과정, 고전 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힘쓴 인문주의자들의 발자취 등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진보의 거대한 바퀴를 굴린 책의 힘을 세련되게 떠올리도록 한다.
의 저자 로버트 단턴은 이른바 '책의 역사가'로 불린다. 이 책으로 미국비평가협회상(1996년)을 받았고 국제구텐베르크협회의 구텐베르크 기념상(2004년)을 수상했다. 전작인 에서 보여주듯 이 책에도 프랑스 혁명과 동력으로 작용한 민중문화에 대한 천착의 결과물을 담아냈다. 저자는 혁명을 이끌어낸 원동력이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 프랑스 계몽주의 학자들의 저작이라는 학계와 세인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무엇보다 인쇄물의 보급기였던 당시 유럽의 민중은 계몽사상서를 매력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혁명의 불씨라 여기기엔 충분히 뜨겁지 않았다는 얘기다. 대신 와 같은 볼테르의 포르노그래피에 더 열광했고 이들 '나쁜 책'?사람들의 감성을 폭발적으로 자극하고 급기야 봉건적 인식체계를 흔들었다고 주장한다. 계층을 뛰어넘는 연애담이 평등이라는 관념을 불러냈고 성직자들의 추문과 정치가들의 사생활을 조롱한 '점잖지 않은 베스트셀러'가 앙시앵 레짐을 의도적이든 아니든 전복시켰다는 것이다.
이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쇄술과 그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조용히 진보의 탄력을 붙여왔는지 큰 그림으로 보여준다면, 은 그 가운데 프랑스 혁명 전후라는 시공간을 특정해 '금서'들의 유통과 민중의 반응이 구체제 전복을 이뤄낸 작지만 구체적인 묘사를 독자에게 전한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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