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자본주의는 빙산경제… 물밑 거대한 바닥엔 여성 착취의 가부장제"

알림

"자본주의는 빙산경제… 물밑 거대한 바닥엔 여성 착취의 가부장제"

입력
2014.02.14 10:47
0 0

사랑·돌봄·모성 등 가사노동은 임금 없고 시간 계산 안 되고의료보험과 노령연금도 없어 우연 아닌 체제에 내재된 본질식민지 착취와 자연 수탈까지분석의 틀 확대해 자본주의 체제 급소 가격

오늘날 도처에서 목격되는 가부장제는 흔히 '봉건적 잔재' 내지는 '문화지체현상'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지속적인 훈계와 선전, 교육 등을 통해 말소될 수 있다는 게 통상적 믿음이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며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의 핵심 체제"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이전에도 있었지만 자본주의 아래서 더없이 강화되었고",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은 단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체제에 내재한 본질적인 것이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종합적 사고와 분석으로 슬픔과 감탄을 불러일으키며 이 같이 주장하는 이는 독일 쾰른대 사회학과 교수를 지낸 에코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즈(83)다.

1986년 영국에서 초판이 발행되자마자 페미니즘의 고전이라는 평가를 받은 미즈의 정치철학서 가 국내 첫 번역됐다. 더 많은 제3세계 여성에게 읽히기 위해 영어로 씌어진 이 방대하고 거창한 책의 원제는 . 국내 번역본은 1998년 개정판을 텍스트로 삼았다. 출간 30년이 다 된 책임에도 놀라운 현실감으로 독자의 지각을 뒤흔드는 것은,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 쓴 대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 자연에 대한 폭력은 책을 처음 쓸 때 상상했던 것보다 더 잔인하고 가학적으로,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어 왔기 때문"이다.

미즈의 본격적 논의는 자본주의의 계속적인 자본축적 과정을 위해서는 왜 가사노동과 같은 무급노동이 필수적인지를 성별노동분업의 역사적 기원을 통해 추적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어떤 사회에서도 여성의 가사노동은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아왔다. 가정주부는 임금을 받지 않으며 노동시간은 계산되지 않고 의료보험도, 노령연금도 없다. 근대적 의미의 노동개념을 창안해낸 마르크스 역시 가사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재생산노동'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가정주부가 가정에서 생산하는 것은 가족의 의식주에 반드시 필요한 사용가치만이 아니라 '남편의 노동력' 이라는 상품이다. 주부의 가사라는 노동을 통해 남편은 노동시장에서 자신을 '자유'임금노동자로 판매할 수 있다. "국가에 의해 조직되고 보호되는 핵가족은 '노동력'상품이 생산되는 사회적 공장"인 것이다. 미즈는 사랑, 돌봄, 모성 등으로 표현되는 가사노동은 "잉여가치 외부에 있는, 비생산적 노동이 아니라 그 과정이 시작되는 기초이며, 자본축적 과정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마리아 미즈의 논의가 획기적이고 대담한 것은 가정주부의 노동이라는 분석의 틀을 식민지 착취와 자연 수탈에까지 확대하며 자본주의 체제의 급소를 가격하기 때문이다. 손에 물 마를 새 없는, 허리 한번 펼 틈 없는 가정주부의 노동은 그것이 단지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경제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무서운 속도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던 착취와 수탈의 구조적 원형모델로서 중요하다. 그가 '가정주부화'(housewifization)라고 부르는 노동의 형태는 단지 가정주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창출한 모든 생산관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가정주부화한 노동은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잘 보이지 않는, '지하경제'의 일부가 되는, 저임금의 유연한 노동력을 말한다. "가정주부화는 자본가가 감당해야 할 비용을 외부화 혹은 외부영역화한 것"이며 "이는 여성 노동이 자연자원처럼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즈에게 자본주의는 '빙산경제'다. 보이는 공식부문과 보이지 않는 비공식부문으로 나누는 경제의 이중구조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전략이었다. 진짜 경제로부터 배제된 부문은 그러나 사실상 보이는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마르크스가 말한 임금노동은 프롤레타리아 남성-가부장-에게만 허용된 빙산의 드러난 일각일 뿐이며, 물밑의 거대한 밑둥은 가사노동, 비공식 영역의 노동, 식민지에서의 노동과 자연이 만들어낸 보이지도, 계량되지도 않는 생산이다. 임금은 빙산의 일각에만 허용되며, 빙산의 밑둥은 폭력에 의한 착취로 형성된다.

미즈의 논의에서 여성과 식민지, 자연은 폭력적으로 착취를 당하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타자로, 모두 동의어다. 마녀사냥과 식민지 개발을 통해 급속도로 발달하게 된 근대과학이 바로 그 착취의 도구였다. 여성ㆍ자연ㆍ식민지 착취의 틀이었던 성별노동분업은 오늘날 국제노동분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서구 여성들이 슈퍼마켓에서 수백종의 값싼 치즈를 놓고 행복한 고민에 빠지는 것은 제3세계 여성의 노동착취 덕분이다.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가 생산과 소비를 일치시키고, 노동이 그 자체로 즐거운 놀이가 되?자급적 농경공동체를 그 해답으로 제시할 때, 그와 함께 거침없이 질주하던 해방의 서사는 멈칫한다. 아무래도 너무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것 같다. 그렇다면 착취와 폭력이 없는 세계, 탐욕적 소비주의로부터의 해방은 과연 어떻게 가능할지, 이제 '일인칭의 대안'을 고민할 때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