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유서대필 사건' 발생 23년 만에 무죄를 선고 받은 강기훈(50)씨는 울지도 웃지 않았다. 재판부가 무죄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는 동안에도, 무죄가 선고된 순간에도 그는 담담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눈시울을 붉힌 건 법정 안팎의 지인들이었다. 100명 가까이 법정을 가득 메운 이들은 박수를 치며 환영했지만, 강씨는 기뻐할 수 없었다.
강씨는 선고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 이유를 밝혔다. 그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과와 유감이 듣고 싶었다"며 "재판부가 유감을 표시하지 않은 것이 유감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사과가 생략된 재심 선고의 의미에 대해 "과거에 확정된 형을 재심을 통해서 다시 바로잡은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강씨는 "이 재판은 제 재판만이 아니다. 사법부가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였다"며 "사법부의 권위는 저를 세워놓고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이라고 선고하는 게 아니라 겸허한 반성을 함으로써 바로 서는 것이다"라고 했다.
강씨는 "수사 당시 나를 조사를 했던 검사들을 기억한다"며 자신을 재판에 넘겼던 검찰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재심 결과와 관계없이 (검찰의) 사과 한 마디가 나에게는 가치 있고 소중하다"며 "사건 당시 그들이 유죄 확신을 갖지 못했던 느낌을 기억한다. 당시 기억을 잠깐만 떠올려서 어떤 형태로든 유감이나 사과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씨는 과거 유죄 판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필적 감정에 대해서는"필적 감정이란 게 장난 같다. 저는 뻔히 다 아는데 과학이니 뭐니 따지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며 "'악의 평범함'이라는 말이 생각난다"고 지적했다. 악의 평범함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도운 혐의로 체포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가 남긴 말이다. 강씨는 "일(감정)만 열심히 했을 뿐이라지만 그 결과로 인해 어떤 피해와 파장이 있을지 생각을 하지 않는 건 또 다른 악"이라고 꼬집었다.
강씨는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희생에 고마움을 표했다. 그는 "이 자리에 오기까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분들의 위로와 격려를 잊지 않고 있다"며 "제게 욕했던 사람들도 피해자이고, 그 분들을 포함해 저보다 더 괴로워하고 아파했던 분들에게 오늘 판결이 조금은 풀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특히 고 김기설씨에 대해 "나는 갑자기 잡혀 들어갔고, 그 사람은 유서도 못 쓰는 사람이 됐다"며 "오늘 재판을 통해 한이 조금이라도 풀리게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강씨와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은 14일 오전 11시 국회에서 그 동안의 재판 과정과 이날 재판 결과의 의미 등을 설명하는 자리를 가질 계획이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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