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의 현실 담는것이 작가, 한국 사람들의 모습서 생동감 느껴예술은 호기심 자극 요소 있어야… 그래서 LED·비닐 등 새 기법 활용직립보행하는 인간들 아름다워 굳이 이상적 몸매 그릴 이유 없죠
줄리언 오피의 그림에는 땀 냄새가 없다. 땀은커녕 모공조차 없을 것 같은 그림 속 인물들은 웃지도, 울지도, 서로 마주보지도 않는다. 이목구비는 과감한 생략을 거쳐 점이나 선으로 표현되며 이마저 없을 때도 많다. 익명의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무심한 풍경 위에 작가는 밝고 선명한 색을 입힌다. 참으로 산뜻한 타자화다.
땀 냄새가 없기로는 작업 과정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거리에서 찍은 사진을 가지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윤곽선을 그린 뒤 기술자에게 맡겨 회화나 조각으로 만든다. 이런 그를 두고 혹자는 '앤디 워홀 이후 팝아트를 대표하는 작가'라 칭송하고 어떤 이들은 '최악의 현대미술가'라 폄하한다.
평단에서 어떤 말이 오가건 전세계는 단조롭고 평면적인 오피의 그림에 여전히 열광한다. 검고 굵은 윤곽선과 도식화한 인물들, 선명한 색채로 대변되는 그의 작품은 만국 공통어처럼 쉽고 친근하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위해 방한한 작가를 만난 것은 이 만국 공통어를 해석하기 위해서였다. 산뜻한 배경 속에서 얼굴이 지워진 채 바삐 걷는 '오피의 사람들'은 어떤 속내를 갖고 있을까.
2009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국내 전시에서 작가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과 동작구 사당동의 행인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포함해 자신의 영원한 관심사인 '걷는 사람'이 담긴 LED 영상 패널, 레진으로 만든 대형 조각 등을 선보였다. "동시대의 현실을 담는 것이 작가"라고 말하는 그에게 당신의 눈에 비친 현실이 무엇인지 물었다.
_물감을 칠하는 대신 색이 있는 비닐을 재단해 붙인 것이 인상적이다. 이것 때문에 작품보다 상품 같은 느낌이 더 강해지는데, 의도한 것인가.
"물감으로 작업한 것은 1987년이 마지막이다. 물감의 문제는 한 자리에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림의 주제만큼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어떤 재료나 기술이 있는지를 파악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물감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은 없지만 물감으로는 내가 원하는 모습을 표현할 수 없다. 새롭지 않다는 것도 단점이다. 나는 새로운 재료나 기법에 관객들이 호기심을 보일 때 기쁘다. 비닐이나 LED 패널이 그런 것이다."
_당신의 그림 속 인물들은 표정이 없다. 활기차게 걷거나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일면 고독해 보인다. 당신이 느끼는 현실이 이런 분위기와 관련 있나.
"우리는 현실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배우는 것이다. 눈 먼 사람이 시력을 막 되찾았을 때 사실상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시각을 통해 정보가 들어와도 그걸 처리하는 방식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처리된 정보이지 현실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도 현실을 반영하기에 충분치 않다. 작가는 자신이 느낀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사람들이 걷는 영상이나 도식화한 인물 그림은 내 나름대로 처리한 정보를 공유하는 방식이다.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그건 무척 다행한 일이다."
_개인적으로는 인간 관계의 화학작용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 때문에 당신의 그림을 좋아한다. 이건 당신의 의도와 무관한가.
"뭔가 결여돼있다는 말은 상당히 부정적으로 들린다. 반대로 내 그림에 있는 것을 말해달라."
_당신이 그리는 여체에는 보편성이 있다. 조각 같지도, 그렇다고 너무 퍼지지도 않은 보통의 아름다움이 있다.
"나는 이상적인 몸매에는 관심이 없다. 인물을 지나치게 이상화시키는 것은 파쇼적이라고 생각해서 경계한다. 내가 사람들의 걷는 모습에 집착하는 이유는 동물로서의 인간을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걸을 때 옷에 매달린 끈이 달랑달랑 흔들리는 모습, 위 아래로 리드미컬하게 출렁이는 배낭을 볼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음을 느낀다. 이런 소소한 디테일들을 누가 봐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정확하게 구현하는 것이 내 작업이자, 내 즐거움이다."
_신사동과 사당동 작업에 대해 얘기해달라.
"한국에서 사진가가 찍어 보낸 사진 3,000여장 중 마음에 드는 인물을 골라 한 풍경 안에 넣은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걸치고 있는 액세서리, 모자, 가방이 워낙 많아 작업이 무척 복잡했다. 특히 신사동은 사람들이 마치 독특한 모습을 표현하는 프로젝트에 단체로 참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신사동이 옷 잘 입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전시는 갤러리 2관과 3관에서 다음달 23일까지 열린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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