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은 1991년 분신 자살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써준 혐의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산 강기훈씨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무려 23년이 지나서야 누명을 벗었으니 늦어도 너무 늦었다.
재판부는 "91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 결과가 신빙성이 없다"고 밝혔다. 당시 국과수는 김씨 유서와 강씨 진술서 필적이 같다는 감정결과를 제출했고 법원은 이를 결정적인 증거로 봤는데 이게 잘못됐다는 것이다. 국과수는 애초 속필체인 유서와 김씨의 정자체 글씨를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가 검찰의 재감정 요청에 응하는 등 석연찮은 점이 많았으나 그대로 묻혔다. 당시의 공안정국 분위기에서 언론과 검찰, 법원 누구도 진실 규명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은 때문이다.
무죄의 결정적 근거는 2007년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김씨의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을 발견해 다시 실시한 필적감정 결과였다. 유서와 노트의 필적이 일치한 것으로 나타나 강씨가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며 재심권고 결정을 내린 게 이번 무죄 판결로 이어졌다. 사건 발생 당시 검찰이 정권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수사해 김씨의 노트와 메모장을 찾아냈더라면 이런 억울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강씨가 재심을 청구한 뒤에도 검찰이 불복하고 법원이 재심개시 결정을 미루는 바람에 6년이 더 소요됐다. 검찰과 법원이 진실을 외면하는 동안 강씨는 동료를 죽음으로 몰고 간 파렴치범이라는 오명을 쓰고 20년 넘게 고통을 겪어왔다. 간암수술까지 받고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재판부는 어제 "장시간 항소 과정에서 협조해 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 드린다"고 언급했을 뿐 강씨에 대한 사과의 말은 하지 않았다. 역사가 왜곡되고 사법부의 명예가 실추되고 한 시민의 삶이 무너졌는데 한 마디 유감 표명조차 없었던 것은 매우 아쉽다. 당시 수사 관련자들은 지금도 "수사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강변하고 있다고 한다. 검찰과 법원, 수사 관련자들은 역사 앞에 겸허하게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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