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50)씨의 반생을 옥죈 '유서대필' 사건의 서막은 1991년 4월 26일 당시 명지대 1학년생이던 강경대(당시 20세)씨가 시위 도중 숨진 사건이었다. 강경대씨가 교내로 진입한 경찰 '백골단'에 의해 쇠파이프로 집단구타 당해 숨진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국은 들끓었다. 사흘 뒤 전남대생 박승희씨가 "살인정권을 규탄한다"며 분신했고 광주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20만명이 모였다. 이어 안동대생 김용균씨, 경원대생 천세용씨 등이 잇따라 분신했고 수많은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른바 '분신 정국'이었다.
김기설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도 그 해 5월 8일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폭력살인 만행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한 뒤 투신해 숨졌다. 당일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고, 검찰은 바로 '배후세력'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를 맡은 서울지검 강력부는 5월 18일 "김기설씨 필적이 유서와 다르다"고 밝혔고, 이틀 뒤 유서 대필자로 전민련 총무국 부장이었던 강기훈씨를 지목했다. 이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을 근거로 강씨를 자살방조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유서대필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거세지면서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정권 책임론'은 힘을 잃었고 여권은 "동료를 죽음으로 내 몬 살인자 집단"이라며 민주화운동 진영에 대한 역공을 퍼부었다. 강씨는 혐의를 극구 부인했지만 1992년 대법원이 강씨의 상고를 기각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의 형이 확정됐다. 강씨는 1994년 8월 만기 출소했다.
사건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07년 7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김씨의 필적이 담긴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 등을 입수해 조사에 나서면서다. 진실화해위는 김씨의 친구가 뒤늦게 발견한 노트와 낙서장에 대한 국과수와 사설 감정기관의 필적 감정을 바탕으로 유서대필은 없었다고 결론짓고 재심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후 무죄 선고가 나기까지 무려 7년이 더 걸렸다. 2009년 서울고법의 재심 개시 결정에 검찰이 불복해 즉시 항고했고, 대법원은 3년 넘게 결정을 미루다 2012년 10월에야 검찰의 항고를 기각하고 재심 결정을 확정했다.
재심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특히 검찰은 스스로 요청한 국과수의 필적 감정 결과가 강씨에게 유리하게 나오자 증거 채택을 거부하고 신빙성을 부정하며 끝까지 유죄를 주장했다. 일각에선 당시 사건을 담당한 검사들 상당수가 지금까지 권력의 요직에 있는 점을 들어 "검찰의 과잉 충성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실제로 강씨는 지난달 결심 공판에서 김기춘 당시 법무부 장관(현 청와대 비서실장), 강신욱 부장검사(전 대법관), 신상규 주임검사(현 대검 사건평정위원장) 등 관련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책임을 묻기도 했다.
'강기훈의 쾌유와 명예회복을 위한 시민모임'의 대표 함세웅 신부는 이날 선고 직후 "중앙정보부, 보안사 등 기관에 의한 많은 공안조작 사건이 있었지만 이 사건은 처음으로 검찰이 앞장 선 조작 사건이었다"며 "사죄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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