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허공 위에 꽃을 피우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이 세상에 몸을 두면서 다른 세상의 감각을 지닌 투시자…작가의 미학적 재능은 둔중한 것에서 날카로운 것을,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의 질서를 바꾸는 힘
배관공 조르그는 바닷가의 수백 채 방갈로를 관리해 주는 대가로 그 방갈로 하나에 몸을 붙이고 혼자 냄비에 밥을 끓여 먹으며 그날그날을 살고 있다. 어느 날 열정적이고 맹랑한 아가씨 베티가 그를 찾아와 두 사람은 금방 격렬한 사랑에 빠진다. 언제나 그렇듯 삶은 순조롭지 않다. 베티는 방갈로 주인이 조르그의 노동력을 비열하게 착취하고 자신을 무례하게 대하는 데 분노하여 수습하기 어려운 문제를 일으키고, 삶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없는 조르그와도 싸움을 벌이던 끝에 그가 써 놓았던 원고 뭉치를 발견한다. 밤을 새워 그 글을 다 읽고 조르그가 천재라고 확신한 그녀는 방갈로를 불태워버리고, 아니 차라리 살던 삶을 불태워버리고, 소심한 작가지망생의 등을 떠밀어 대도시로 탈출한다.
나는 지금 장 자크 베네 감독의 영화 '베티 블루 37.2'(1986)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베티 역을 맡았던 베아트리체 달의 광기어린 연기로 국내에서도 반향이 컸던 이 영화는 개정판의 상영시간이 180분에 이른다. 장황하지만 이야기를 마저 하자.
도시로 나온 두 사람은 친구 부부의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하며 생계를 해결하지만, 베티가 원하는 삶은 조르그의 작가적 재능이 받아 마땅한 빛을 받은 다음에야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애써 타이핑하여 여러 출판사에 보낸 원고가 종무소식이거나 혹평과 함께 되돌아오자, 열정적인 그만큼 히스테릭한 베티는 출판사를 찾아가 끔찍한 사고를 저지른다. 그들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친구는 자기 어머니가 타계하면서 남겨 놓은 작은 지방 도시의 피아노 판매점의 관리를 조르그에게 맡긴다. 시골 생활은 그 나름대로 흥취가 있고, 조르그는 피아노를 파는 데 재미를 붙이지만, 베티가 진정으로 바라는 삶은 거기에 없다. 조르그가 소설 쓰기를 잊은 것처럼 보이자, 베티는 임신이라도 해보려 하지만 실패한 후 깊은 우울증에 빠진다. 여자가 머리칼을 자르고 인사불성의 상태가 되자, 조르그는 그녀가 원했던 작가가 되기 위해 때마침 찾아온 한 마리 하얀 고양이를 옆에 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베티가 급기야 제 눈을 도려내고 병원의 침대에 묶이자 조르그에게는 그의 책의 출판이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온다. 그는 병원에 잠입하여 베티를 질식시켜 다른 세상으로 보내고, 피아노 가게에서 혼자 냄비에 밥을 끓여 먹으며, 베티에게 말을 걸 듯 고양이에게 말을 걸며, 조용히 소설을 쓴다. 그는 작가가 되었다.
이 충격적이고 슬픈 이야기에서, 조르그가 작가의 꿈을 끝내 접었더라면 그 뒤끝이 허망했겠지만, 그가 마침내 작가가 되어 살아 있기에 실제로는 그 슬픔이 더욱 크다. 그 삶을 가장 크게 열망했던 사람이 이미 이 세상에 없으니, 그는 아무런 소용도 없이 작가가 된 셈이다. 어쩌면 그의 삶에서 그 소용과 의미가 되어야 할 사람이 사라졌다고 말하기보다는 세상의 삶 전체가 사라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하나가 없으면 모든 것이 없다는 말이 조르그의 경우보다 더 적절하게 맞아 떨어지는 예를 다른 데서는 찾기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르그는 작가가 되었다. 그가 살던 삶이 불타버린 것은 벌써 옛날이 아닌가. 그는 제 애인 베티의 열정을 타고 이 삶이 아닌 다른 삶을 향해 떠났으니, 작가가 되는 영광도 작가로 사는 행복도 이 세상의 영광이거나 이 세상의 행복일 수 없다. 베티가 그 영광과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없는 이유가 거기 있기도 하다.
한 인간이 작가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소설가의 수만큼 많다. 멀리는 괴테에게도 있고, 가까이는 밀란 쿤데라나 이청준에게도 있다. 좋은 시민이 될 수 없어 시인이 되는 이야기인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는 이상한 사회인으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가장 깊은 성찰을 담고 있으며, 한 흑인 소년의 성장기를 통해 모욕 받는 자의 상상력이 곧 소설의 상상력인 것을 말하는 리처드 라이트의 은 작가 성장 서사와 저항의 서사를 겹쳐 놓는다. 작가는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를 말하면서 작가가 된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변호사가 된다는 것과 다르고, 의사가 된다는 것과 다르다. 공부를 많이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글을 잘 써야 하지만 글을 잘 쓴다고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문학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야 하지만 그 지식의 풍부함이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타고난 것일 수도 있고 훈련된 것일 수도 있는 어떤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고, 그 능력이 발휘될 계기가 필요하다. 말하기 쉬운 말로 흔히 미학적 재능이라고 부르는 이 능력은 둔중한 것에서 날카로운 것을, 단단한 것【?무른 것을 발견하고,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의 질서를 바꾸는 힘이다.
어릴 적에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소금장수가 자염(煮鹽)을 굽는 섬의 부두에서 육지로 팔러 갈 소금을 한 배 가득 싣고 있는데, 낯선 방물장수 노파가 바늘을 팔고 있었다. 그는 문득 그 바늘에 끌려 여러 쌈지를 사서 품 안에 넣었다. 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돛이 부러지니 소금장수는 목숨이라도 구하기 위해 소금을 모두 바다에 던졌다. 날이 개어 정신을 차려보니 배는 어느 낯선 땅에 닿아 있다. 남은 것은 바늘밖에 없었지만, 그 땅에 무슨 변고가 있었는지 사람들이 그 바늘을 사기 위해 거금을 들고 몰려 왔다. 소금을 팔았을 때보다 수십 배의 돈을 더 번 소금장수는 새 배를 사서 고향에 돌아와 부자로 살았다.
소금장수는 예언자가 아니다. 그의 행운은 순전한 우연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그는 계산하지 않았으며 뒷날을 예언하겠다는 생각 같은 것도 없었다. 다만 모든 인간이 고루 지녔을 아름다움에 대한 어떤 본능에 끌린 그가 특별할 것도 없는 바늘에 매혹되었다는 점이나, 몇 쌈지의 바늘이 배 하나에 가득 찬 소금보다 훨씬 더 귀중한 다른 세계의 감각으로 그 바늘을 보았다는 점은 염두에 둘 만하다. 비록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이긴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이기에, 소년 시인 랭보 같은 사람이 그렇게도 열망하였던 '투시자'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랭보는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후세의 문학연구자들이 '투시자의 편지'라고 부르게 될 편지를 선배 시인 드므니에게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내 말은 투시자여야 한다는 것이며, 투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길고 엄청나고 이치에 맞는 착란을 통해 투시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감각이 착란에 이른다는 것은 광인이 된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투시자의 착란은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이치에 맞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심각한 광기를 자신이 자각하며, 그 경험을 논리적인 말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착란이나 광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랭보가 말하는 '모든 감각의 착란'은 이 세상에 몸을 두고 살면서도, 저 소금장수처럼 다른 세상의 감각을 확보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조선시대의 노비가 양반 상놈이 없는 세상을 본다면 그것은 벌써 착란이며, 나무 위에 허공이 있으니 그 나무가 꽃을 피워 올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벌써 투시자이다. 허공은 모든 것이 가능한 자리이며, 다른 세상이란 저 허공과 같지 않는가. 꽃나무는 여기 있지만 꽃이 필 자리는 저 허공이 아닌가.
김수영은 1967년 5월에 '꽃잎'이라는 제목으로 세 편의 시를 발표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여 전의 작업이다. '꽃잎(2)'를 읽는다. "꽃을 주세요"라는 말로 시인이 구하는 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오래도록 끌어안아 온 긴 '고뇌'의 결실일 터이다. 우리에게도 꽃나무에게도 꽃이 피기 전의 삶과 꽃이 핀 다음의 삶은 확연히 다르다. 꽃은 이렇게 이 삶의 시간이 아닌 다른 삶의 '다른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시인이 요청하는 꽃은 그래서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지 세계의 삶이다. 꽃이 소란스럽게 개화하여 이루어질 그 삶에는 '원수'가 없으며, 따라서 착취도 억압도 증오도 없다. 그 미지의 복된 시간은 우리가 지녔던 고뇌의 결과이지만 고뇌가 곧 꽃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변혁의 시간을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그 꽃의 개화는 '거룩한 우연'이다. 꽃이 피면 벌써 다른 세상이기에 아직은 '글자'로만, 다시 말해서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이 꽃, 확연히 보이는 듯하지만, 그러나 떨리며 살아질 것 같은 이 글자의 꽃을 모든 방향에서 살핀다는 것은 얼마나 초조한 일인가. 이 삶을 불태워버리기는 얼마나 '싫은' 일이며, 미지의 신비를 향해 우리의 생명 전체를 내던진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미학적 재능은 그 일을 감행하는 재능이다. 다시 저 영화 '베티 블루 37.2'로 돌아가면, 주인공 조르그는 제 삶을 불태워 파괴하고, 다른 삶을 열망하던 제 애인마저 죽이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삶에서는 행복과 제 열망마저 죽이고, 한 인간의 삶에서 작가의 삶으로 건너갔다. 한 사람이 작가로 성장한다는 것은 한 세상을 다른 세상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꽃잎(二)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금이 간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하얘져가는 꽃을
노란 꽃을 주세요 넓어져가는 소란을
노란 꽃을 주세요 원수를 지우기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우리가 아닌 것을 위해서
노란 꽃을 주세요 거룩한 우연을 위해서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내 말을 믿으세요 노란 꽃을
못 보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떨리는 글자를 믿으세요 노란 꽃을
영원히 떨리면서 빼먹은 모든 꽃잎을 믿으세요
보기 싫은 노란 꽃을
고려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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