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양산에 사는 고교 1년생 김모군은 2012년 눈이 침침해지고 컨디션도 떨어진 것 같아 어머니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의사의 진단은 만성골수성백혈병.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당장 항암제 글리벡을 먹으며 치료에 매달렸다. 그런데 부작용이 너무 심했다. 뼈 통증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해 응급실을 수 차례 드나들었고 급기야 마약성 진통제까지 썼다. 다른 약으로 바꿔보려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글리벡 말고 다른 약들은 만 18세 미만 환자에게는 건강보험 적용이 안돼 한 달에 100만원 가까이 되는 약값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울로 병원을 옮겼다. 글리벡 부작용을 줄여주는 약을 함께 쓰면서 김군의 상태는 좀 나아지는 듯했다. 학교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병이 다시 악화했다. 글리벡의 약효도 예전 같지 않았다. 내성이 생긴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스프라이셀로 약을 바꿨고 지금까지 1주일에 한번씩 양산과 서울을 오가고 있는데 그때마다 차비와 치료비로 수십만원을 쓰고 있다. 김군의 어머니는 "이 비용을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일찌감치 약을 바꿀 수 있었다면 아이가 이렇게까지 고생하지 않았을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글리벡의 단점을 보완하는 2세대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는 국내에 스프라이셀 말고도 타시그나, 슈펙트 등 여럿이 나와 있다. 하지만 김군 같은 어린 환자에게는 값이 너무 비싸다. 성인 환자는 건강보험이 적용돼 약값의 5%만 내지만 소아 환자는 100%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1세대 치료제인 글리벡이 소아나 성인 모두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것과 대조적이다.
2세대 치료제에 환자 나이에 따른 차별이 생긴 이유로 보건당국은 안전성 문제를 든다. 만 18세 미만 환자의 안전성을 입증할 수 있는 충분한 임상시험 근거가 없어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성인에게만 사용을 허가했고 따라서 건강보험도 성인 환자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한 관계자는 "글리벡은 과거 허가 당시 소아와 성인의 구분이 없었던 데다 10년 이상 써왔기 때문에 소아에 대한 데이터가 누적돼 있어 보험 적용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전문의들은 그러나 소아 만성골수성백혈병은 임상시험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한다. 환자가 너무 적고 부작용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다. 김동욱 서울성모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만성골수성백혈병의 성인과 소아 환자 비율은 약 20대 1로, 국내 소아 환자는 50명이 채 안 된다"며 "게다가 소아에게 항암제를 쓰면 성장장애가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글리벡 역시 소아 대상 임상시험을 별도로 하지 않았다.
2세대 치료제 중 스프라이셀은 만 18세 미만이라도 예외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최근 허가됐다. 합법적으로 처방받을 순 있지만 약값은 모두 환자가 내야 한다는 조건이다. 김군이 바로 이 사례에 해당한다. 김 교수는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약을 제때 못 쓰는 의료진이나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느냐"며 "글리벡과의 형평성 측면에서도 보건당국이 2세대 치료제에 소아 보험을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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