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열에 몸살로 고생했다는 사람을 요즘 심심찮게 만난다. "독감이 엄청 유행이라는데" "이번 독감 아주 독하다는데" 하는 걱정 섞인 인사말도 흔해졌다. 그런데 객관적인 수치로 따져보면 이번 겨울 독감이 예년에 비해 유난스러운 건 아니다. 독감은 해마다 유행했고 환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증상을 앓았다.
이번 독감이 유독 심하게 느껴지는 이유로 전문가들은 지난 일은 쉽게 잊고 눈앞의 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의 심리, 조류 인플루엔자(AI) 유행과 '신종 플루'란 단어의 재등장이 가중시킨 공포감을 꼽는다. 이번 독감이 여느 해와 다른 점도 물론 있다. 이 차이가 의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크게 우려할 것 없이 여느 해처럼 차분하게 대응하면 된다는 데는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잠잠하던 H1N1 다시 기지개
올 겨울 독감(인플루엔자) 양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H1N1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활약이다. 2009~2010년 신종 플루라는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망자를 낸 바로 그 바이러스다. 사실 적잖은 전문가들이 H1N1이 조만간 다시 유행할 거라고 예상해왔다. 불과 3, 4년 전만 해도 그렇게 위력을 떨치던 바이러스가 그 동안 너무 잠잠했기 때문이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다른 바이러스보다 검출률이 낮았다.
전문가들의 추측이 맞았다. 실제로 현재 검출되고 있는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상당수가 H1N1이다. 같은 A형에 속하는 H3N2의 검출 건수보다 2, 3배 많다. H1N1의 증가는 국내뿐 아니라 미국, 유럽, 중국 등 북반구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통적이다.
전문가들은 '군집 면역'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H1N1이 2009~2010년 처음 유행할 때 사람들은 이 바이러스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항체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아주 심하게 앓거나 목숨까지 잃었던 이유다. 그러다 H1N1에 감염됐다 회복한 사람이 늘고 백신도 맞으면서 항체를 가진 사람이 점점 증가했다. 덕분에 H1N1은 일반적인 계절독감의 하나가 되면서 한동안 기를 펴지 못했다. 이게 바로 군집 면역 효과다.
하지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항체의 방어력은 오래 가지 못한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2009년 유행 당시 신종 플루를 앓고 나서 항체가 생겼던 사람도 지금쯤은 항체의 방어력이 떨어졌고 지난 가을 예방접종을 했어도 항체가 제대로 안 생긴 사람이 있다"며 "이런 요인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H1N1이 다시 기승을 부리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설명했다. 비단 H1N1뿐 아니라 다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2, 3년 주기로 활발하다가 주춤하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B형이 유행 초반 주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H1N1의 재등장보다 더 의문을 낳는 것은 B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출현 양상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유전자나 단백질 같은 구성 성분과 전체 구조 등에 따라 A형과 B형으로 나뉜다. 최근 10여 년 동안은 가을과 겨울에 A형이 인플루엔자 유행을 주도하고 B형은 봄이 가까워서야 나타났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올 겨울에는 유행 초반부터 B형의 우세가 두드러졌다. 보건당국이 인플루엔자 의심 환자의 검체에서 바이러스 확인(유전자 검사)을 본격 시작한 첫 주(2013년 12월 29일~2014년 1월 4일)에 B형 바이러스가 검출된 검체는 36건으로 A형(H3N2 4건, H1N1 15건)의 19건에 비해 2배 가까이 많았다.
A형과 B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증상이 비슷해 일반적 진단만으로는 구분하기 어렵다. 다만 A형이 폐렴 같은 합병증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일으키고 고령자가 감염될 경우 사망률이 더 높다. B형은 소아에게 더 잘 감염된다. 김우주 교수는 "B형 바이러스가 이번 독감의 유행을 주도한 원인이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와 기후가 비슷한 중국 양쯔강 북부의 관련 데이터가 국내와 유사한 걸로 보아 중국과의 인적 교류 증가가 한 영향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지난해보다는 심하고 그 전보다는 덜해
국내에서는 해마다 30만~50만명이 독감을 앓는다. 이 많은 환자의 검체를 일일이 분석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보건당국은 1년 내내 인플루엔자를 감시하는 의료기관을 별도로 정해 놓는다(표본감시). 이들 기관은 38도 이상의 발열과 호흡기 증상 등으로 독감이 의심되는 환자 수를 보건당국에 신고한다. 또 이 중 일부 의료기관은 독감 의심 환자의 검체에서 바이러스를 분리하고 유전자를 검사해 진짜 인플루엔자가 맞는지를 확인한다. 이 같은 결과를 토대로 보건당국은 독감 유행 여부와 유행 바이러스를 공식 발표한다.
지난 겨울까지는 의료기관 850여 곳이 표본감시에 참여했는데, 워낙 많다 보니 신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데이터가 부정확했다. 이에 보건당국은 표본감시 의료기관을 200여 곳으로 조정했다. 신고 건수를 줄이는 대신 정확도를 높인 것이다. 이 영향으로 유행 기준 환자 수도 1,000명당 2~4명에서 12.1명으로 바뀌었다. 신고 건수가 1,000명당 12.1명을 넘으면 전국에 독감이 유행하고 있다고 판단한다는 의미다.
변경된 기준을 적용해 환산하면 2010~2011년, 2011~2012년 독감 유행 시기에는 환자 수가 정점을 기록할 때 1,000명 당 80명에 육박했다. 그러다 2012~2013년 유행기에는 정점일 때도 약 40명 수준이었다. 설 연휴를 지나면서 1,000명당 42명을 기록한 올 겨울 독감 환자는 지난해보다는 약간 많지만 그 전보다는 적다.
다만 보건복지부는 "개학과 맞물려 앞으로 3, 4주 동안 유행이 지속돼 의심 환자 수가 예년과 비슷한 1,000명당 60~70명 수준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환자가 더 늘더라도 바이러스에 변이 등의 변화가 없는 만큼 기본 예방수칙을 지키며 예년처럼 대응하면 된다"고 조언한다. 한편에선 변경된 유행 기준을 처음 적용한 만큼 분석에 신중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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