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정읍시내를 지나는 길에 '응답하라, 1894…' 어쩌고 하는 플래카드를 봤을 때, 꽤나 인기를 끈다는 그 드라마로 뮤지컬이라도 만든 갑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다. 퍼뜩 그 숫자가 갑오년의 시렸던 겨울을 뜻하는 것임을 깨닫고 아차 했으나, 차는 이미 고속도로에 들어선 뒤라 어쩌지 못하고 그냥 서울로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지난 주말 다시 정읍으로 갔다. 음력으로 정월 초열흘이었다. 꼭 두 갑자 전 갑오년 겨울, 언 손으로 죽창을 움켜쥔 농투성이들이 고부관아로 쳐들어 간 날이다.
감나무는 죽고 없었다. 전북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 면사무소 앞 네거리에 우뚝 서 있던 굵은 나무는 뽑혀나갔다. 그 자리엔 어린 감나무가 새로 심겨 있었다. 나무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된 문화재여서 안내판에 죽은 해(2003년)가 기록돼 있다. 농기구 수리점 아저씨는 병에 걸려 고사했다고 했고 농협 연쇄점 할머니한테 물었더니 "벼락을 맞아 죽어부렀다"고 했다. 기억이란 그런 것일까. 겨우 10년 저쪽 당산나무가 죽은 까닭도 희미한데 120년 전 농민혁명군의 발자국을 따라가보자는 것이 가당한 일일까. 무작정 가보기로 했다. 출발점은 여기 말목장터다.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은 이 나무 아래 서서 배들(梨坪)의 백성들에게 들고 일어나 세상을 뒤엎자고 외쳤다. 혁명의 시작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인 혁명이었다. 삼남지방뿐 아니라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에서도 학정과 수탈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봉기했다.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깃발이 들불처럼 번졌다. 기울어가던 왕조는 그 불길을 붙잡을 힘이 없었다. 그래서 바다 건너 토포군을 불러들였다.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의 군대는 걸군(乞軍)에 가까운 농민혁명군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혁명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끝까지 쫓아가 도륙했다. 그래서 전국 어디나 동학혁명의 흔적은 물로 씻어낸 장독대의 마른 소금 버캐만큼만 남아 있다. 그런 흔적이나마 실한 곳이 전라북도 정읍, 그리고 고창 땅이다.
"그런데 자네 그것 아는가?" "네?" "아녀… 됐어." "무슨 말씀인데요?" "전두환이가… 그 사람 할아버지가 동학군이었다는구먼."
말목장터에서 차로 10분쯤 떨어진 황토현전적지에서 만난 노인은 뜻밖의 말을 했다. 이곳 사람들이 황톳재라고 부르는 황토현은 정읍시 이평면과 덕천면 사이에 있다. 해발 30m 남짓. 재라기보다는 평지에 가까운 둥그스름한 땅이다. 1894년 4월, 2차 봉기한 혁명군이 관군에 맞서 대승을 거둔 역사가 서려 있는 전적지다. 이곳에 1983년 처음 동학혁명과 관련한 기념관을 만든 게 군인 출신 대통령 전두환이다. 그리 멀지 않은 땅을 피로 물들이고 권력을 찬탈한 그였고, 혁명이라는 말이 붙은 건 뭐든 불온시하던 때였다. 그가 황톳재의 혁명전쟁을 추념하는 집을 지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혁명군의 후손들은 전두환의 조부가 동학군이었다는 에피소드라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황토현기념관은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관으로 확대돼 전시와 교육 시설로 쓰인다. 혁명의 유물 중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건 그다지 많지 않아서, 대부분의 콘텐츠는 당시의 역사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한 전시품이다. 그 속엔 한과 긍지, 분기와 쾌감과 무력함이 칸막이 없이 뒤엉켜 있었다. 그래서 이 공간은 내내 갑오년일 듯했다. 말목장터의 죽은 감나무가 이곳으로 옮겨져 콘크리트 바닥을 뿌리로 딛고 서 있는데, 아랫도리를 어디 묻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싶게 애처로워 보였다.
황토현의 북쪽, 정읍천과 동진천이 만나 동진강이 시작되는 곳이 만석보 터다. 순한 조선의 농민을 혁명세력으로 바꾼 역사가 이곳에서 비롯됐다. 이곳 물줄기는 대대로 고부 농민들이 논물로 쓰던 것이었는데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보를 쌓고 백성들에게 감당키 어려운 물세를 부과했다. 거듭된 탄원이 묵살되고 항의하는 자는 옥에 갇혔다. 1월 11일 새벽 전봉준이 고부관아에 들이닥쳤을 때 조병갑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고 전해진다.
만석보에서 서쪽으로 6㎞ 가량 떨어진 곳에 조소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전봉준이 살던 옛집이 있다. 갑오년 봉기 당시 전봉준의 나이는 서른 아홉이었고 직책은 고부군의 접주(동학 교구의 책임자)였다. 관에 의해 복원된 지 얼마 안 된 옛집은 포르말린에 담갔다가 막 꺼낸 듯 말끔했다. 작고 소박했다. 간판을 떼 놓고 보면 그저 푸근한 옛 초가다. 전봉준은 이 마을(당시엔 양교리) 훈장 선생님이었다. 약방을 열고 약을 만들어 팔기도 했고 일이 바쁠 땐 농사도 거들었다. 어려서 키가 작아 녹두라는 별명을 얻은 전봉준의 마당은, 그의 키만 했을 높이에서 허리가 비틀어진 값비싼 소나무와 깔끔한 잔디로 조경돼 있었다. 차라리 그 마당을 동네 주민들에게 채마밭으로 내주는 게, 농민혁명군 총대장의 옛집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창은 정읍 다음으로 갑오년 혁명의 자국이 진한 곳이다. 서쪽 끝, 구시포 해수욕장 가는 길에 무장면이 있다. 갑오년 당시 혁명의 불길이 가장 크게 타오른 고을이다. 이곳은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혁명을 이끌었던 손화중의 근거지로 3월 20일 전봉준 등은 여기서 첫 창의문을 포고했다. 이른바 무장기포(起包). 학계에는 이를 고부봉기와 구분해 본격적인 농민혁명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의외로 혁명군은 이곳의 동헌을 건드리지 않았다. 읍성의 객사 등도 옛 모습대로 남아 있었다. 학자들은 이미 무장현의 아전들까지 동학교도가 됐을 만큼 이곳이 동학의 핵심 지역이었던 까닭으로 해석한다. 가까운 곳에 혁명군의 훈련장이자 숙영지였던 여시뫼봉(왕제산)이 있다. 이곳은 1970년대까지 전투경찰대의 방어 기지로 사용됐다.
전봉준과 김개남과 손화중이 태어나거나 잡힌 집, 묻힌 자리, 혁명군이 빼앗은 성과 관아가 정읍과 고창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지닌 곳은 선운사 도솔암이다. 도솔암 서편 칠송대 바위엔 높이 20m에 가까운 거대한 마애불이 있다. 부처의 배꼽께에 세상을 바꿀 비결이 들어 있는데 그걸 꺼내는 날 하늘과 땅이 뒤집혀 새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전설이 깊다. 혁명 당시 손화중이 그 비결을 꺼냈다는 말이 파다하게 퍼졌다. 말은 삽시간에 번져 전국의 핍박 받던 백성을 혁명군으로 끌어들였고 핍박하던 양반을 떨게 만들었다. 그 이야기의 진위를 밝히자고 드잡는 일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조부가 진짜 동학군이었는지 따지는 것만큼 부질 없을 것이다. 어쩌면 동학혁명 자체가 새 세상을 기다리는 백성들의 간절함이 만들어낸 한판 걸진 '이야기'는 아니었을까.
혁명군의 진격로를 따라가는 여행은 공주 우금치에서 끝이 난다. 봄과 여름이 지나고 갑오년 가을, 한양으로 향하던 혁명군은 요충지인 공주에 총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공주로 넘어가는 고개인 우금치는 이미 일본군의 주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수만 단위였던 혁명군은 곧 수천으로, 그리고 퇴각할 때는 수백으로 줄어 있었다. 십여 년 전 이곳의 역사성을 담은 공원이 조성됐다. 그때 세운 조형물이 마치 혁명군의 최후인 듯 쓰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고갯마루 장승의 혈관엔 여전히 혁명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 가슴팍에 '비정규직 철폐' '평등교육 실현' 같은 구호를 새기고 있었다. 도망가던 혁명군을 산 채로 못에 빠뜨려 죽였다는 송장배미를 거쳐 혁명군 최후의 목표였던 공산성에 올랐다. 4대강 사업으로 각진 모습으로 바뀐 금강이 천천히 흐르는 게 보였다. 왠지 갑갑해지는 이유가 그 강의 모습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행수첩]
●정읍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유적은 서해안 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위치해 있다. 부안, 줄포, 정읍 IC가 가깝다. 5월 초 황토현동학농민혁명기념제가 열린다. 기념 공연 및 숙영 캠프, 농악경연대회 등이 진행된다. 정읍시 관광진흥팀 (063)530-7142 ●고창 예향천리마실길의 제9코스(19.5㎞)는 '동학농민군 진격로'다. 무장기포지, 무장읍성 등 혁명 관련 유적지를 이은 길이다. 고창군 문화관광과 (063)560-2454 선운사 (063)560-8686
정읍ㆍ고창ㆍ공주=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