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키득거렸다. 직설적이면서도 삶의 본질을 갈파하는 대사들이 곧잘 웃음으로 연결됐다. 한바탕 소동극으로 인생의 페이소스를 빚어내는 솜씨가 정교했다. 20일 개봉하는 영화 '아메리칸 허슬'은 유쾌하면서도 간단치 않은 메시지를 품은 수작이다. 경쾌하게 삶의 부조리에 통렬한 한방을 날린다. 단맛을 내다가도 씁쓸한 뒤끝을 남기거나 매우면서도 달콤하기도 한 우리네 인생과도 같은 영화다. 다음달 열릴 제86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등 10개 부문에 후보로 오른 화제작답다.
영화의 시작은 협잡꾼 어빙(크리스천 베일)이 알린다. 정수리 부근 머리카락이 움푹 빠진 어빙이 거울을 보며 머리 형태에 공을 들이는 장면부터 상징적이다. 사기를 호구지책으로 삼은 어빙의 비루한 삶을 간략히 묘사하면서도 서로 속고 속여야 살아남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함축한다.
등장인물이 좀 많다. 어빙과 그의 연인이자 동업자인 시드니(에이미 애덤스), 둘을 윽박질러 실적을 올리려는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 리치(브래들리 쿠퍼), 어빙의 아내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고뭉치인 로잘린(제니퍼 로렌스)이 밀고 당기며 스크린의 무게 중심을 잡는다.
어빙과 시드니는 육체 관계처럼 끈끈한 협업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등치며 손쉽게 돈을 벌어들이다가 리치에게 덜미를 잡힌다. 리치가 어빙과 시드니에게 감옥으로 보내지 않는 대신 수사에 협조하라고 겁박하면서 이야기는 본궤도에 오른다. 리치와 어빙과 시드니가 꾸민 함정수사에 청렴한 정치인이 걸려들고 거물 마피아와 미국 상ㆍ하원 의원까지 고구마 줄기처럼 엮인다. 리치의 욕심이 커지면서 목숨까지 위태로워진 어빙은 반전을 노리는데 질투에 사로잡힌 로잘린이 훼방꾼으로 등장한다. 리치가 시드니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소동은 덩치를 더욱 키운다.
영화에는 "사람은 믿고 싶은 걸 믿는 거야!"(People believe what they want to believe!)라는 대사가 종종 나온다. "세상은 흑백으로 나뉘는 게 아냐. 죄다 회색이야" "사람은 사기를 쳐 목적을 이루는 존재야"(어빙)라는 말도 등장한다. 마치 영화는 이 세상은 온통 사기로 이뤄진 복마전이 아니냐고, 거짓과 진실의 경계가 분명한 삶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듯하다. FBI 요원이 천하의 협잡꾼과 결탁해 사기나 다름없는 함정수사를 벌이는 장면을 보다 보면 반박할 근거가 사라진다.
배우들의 연기가 하나 같이 빛난다. '올챙이 배'와 '알머리'로 등장하는 크리스천 베일(이 영화를 위해 20㎏을 찌웠다)은 배트맨의 카리스마를 깡그리 지운다. 뽀글뽀글한 촌스러운 머리로 헛똑똑이의 전형을 보여주는 브래들리 쿠퍼는 과연 세계 최고의 섹시남으로 뽑혔던 배우였냐는 의문이 든다. 영국과 미국 악센트를 오가며 관객 혼까지 빼놓는 에이미 애덤스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24세라는 젊은 나이가 무색하게 능구렁이처럼 연기하는 제니퍼 로렌스도 눈부시다. 네 배우의 연기 앙상블에 로버트 드니로도 빛을 잃을 지경이다.
감독 데이비드 O. 러셀은 배우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듯하다. 그는 '파이터'(2010)로 베일과 멜리사 레오에게 아카데미 남녀조연상을,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으로 로렌스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줬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경우 출연배우들이 아카데미 남녀주연상과 남녀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아메리칸 허슬'도 베일과 애덤스를 남녀주연상 후보에, 쿠퍼와 로렌스를 남녀조연상 후보에 올렸다. 정작 러셀은 오스카 트로피를 손에 쥔 적이 없다. 그도 올해는 아카데미 시상대에 설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영화는 골든글로브상 뮤지컬ㆍ코미디 부문 작품상 등 3개 상을 받았다. 청소년관람불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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