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남북 고위급 접촉의 수석대표로 김규현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을 선임한 것은 '청와대 관계자'를 협상 대표로 지목한 북측의 요청 때문이다. 지난해 수석대표의 격(格)과 급(級) 논란 탓에 6년 만에 재개될 남북당국회담을 무산시켰던 전례에 비춰보면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규현 안보실 1차장과 북측 카운터파트인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은 모두 차관급으로 급은 어느 정도 구색을 맞췄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협상의 격이다. 북측은 지난 8일 국방위원회가 고위급 접촉 통지문을 청와대 안보실 앞으로 보냈으나 12일 남북 접촉에 나서는 북측 인사는 통전부 소속인 원동연 부부장이다. 결과적으로 정부만 북측 요구를 수용한 셈이 됐다. 정부 당국자도 "협상 대표로 청와대 관계자를 선정한 건 흔치 않은 일"이라고 했다.
물론 정부는 청와대 관계자의 회담 참여가 처음은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실제 2007년 12월29일 개성에서 열린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추진위원회 1차 회의' 당시 백종천 청와대 통일외교안보 정책실장과 북측 박송남 국토환경보호상이 각각 수석대표로 나왔다.
그러나 박근혜정부는 출범 이후 남북 대화에서 내용뿐 아니라 형식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지난해 6월 최종 결렬된 남북당국회담의 경우 우리 측은 북측 수석대표로 김양건 통전부장의 참석을 요구했고, 북측의 거절로 남측은 류길재 장관 대신 김남식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통보했다. 북측이 이에 반발하면서 회담은 끝내 무산됐다. 이른바 '통(통일부)-통(통전부)' 라인으로 한반도 정책을 총괄하는 남북 협의체의 격을 맞춰야 한다는 정부의 고집이 빚어낸 결과였다. 정부는 당시 김양건 통전부장의 불참이 예상되자 회담 명칭도 장관급에서 당국간 회담으로 낮추는 안도 관철시켰다.
때문에 이번 접촉에서 청와대 인사를 수석대표로 선정한 것은 정부가 지켜 온 원칙에 위배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게다가 김규현 1차장은 외교부 차관 출신으로 대북정책 경험은 사실상 전무하다. 남북관계 주무부처인 통일부에서 대표단에 포함된 인사는 배광복 회담기획부장이 유일하다. 반면 북측은 대남 전략ㆍ전술업무를 조정ㆍ통제하는 통전부가 협상을 지휘해 주도권 싸움에 밀리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이런 고위급 접촉 형식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협상에서 성과가 없으면 책임도 청와대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정부가 모처럼 찾아온 남북 해빙무드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융통성을 발휘했다는 시각도 있다. 대북 소식통은 "특정 의제라면 합의를 도출해야겠지만 12일 접촉은 남북이 폭넓은 관심사를 논의하는 자리여서 북측의 의도에 말려든 것은 아니다"라며 "협상이 잘돼 후속 접촉이 이어지면 그 때 전문성을 갖춘 실무자를 대표단에 포함시켜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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