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북한이 국방위원회 명의로 서해 군 통신선을 통해 청와대 국가안보실 앞으로 돌연히 고위급 접촉을 제안해 오자 우리 측은 적잖이 당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산가족 상봉에 합의한 직후인 지난 6일 국방위 성명을 통해 남한에 한미 연합 군사훈련과 비방ㆍ중상 중지를 거듭 요구하며 상봉을 재고할 수 있다고 위협한 터였기 때문이다. 예측할 수 없는 북측의 변칙적 스타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닌 우리 당국이지만 이번처럼 느닷없는 경우는 드물었다.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당일 곧바로 소집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에는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류길재 통일부 장관, 김관진 국방부 장관, 남재준 국가정보원장, 김규현 NSC 사무처장 등이 참석해 북한의 제안 수용 여부를 검토하는 한편 북측 의도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이후 우리 정부는 사흘 간 판문점에서 북측과 수 차례 접촉하며 대표의 격과 날짜 장소 등 고위급 접촉의 세부 내용을 논의하는 한편 북측의 제안 배경을 분석했고, 외교ㆍ안보 부처 협의를 거쳐 11일 북측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최종 결정했다. 북측의 의도가 무엇이든 이산가족 상봉을 앞둔 상황에서 대화를 거부할 이유가 없는 데다 불합리한 제안일 경우 회담장에서 배척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고위급 회담 성사를 위해 남북이 비밀리에 사전 협의를 벌였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북측의 제안이 파격적이긴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연초에 예정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올해 초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이례적으로 강하게 피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내놓은 이산가족 상봉 행사 개최 제안을 북한이 거부하며 경직된 자세를 취하며 남북관계 경색이 심화하는 듯했다. 그러나 같은 달 16일 국방위원회의 '중대제안'을 통해 상호 비방ㆍ중상 중단, 적대적 군사행위 중단을 제안한 데 이어 8일 뒤 다시 '공개서한'까지 보내는 등 유화 제스처가 계속됐다. 이산 상봉을 무산시킨 상황이라 당시 위장 평화공세라는 분석이 우세했지만 돌이켜 보면 남북관계 개선을 모색하기 위한 일관된 신호를 보낸 셈이다. 이산 상봉을 다시 생각하겠다면서도 줄곧 자기들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가 확고하다고 강조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어쨌든 북한이 국제적 고립 돌파를 위해 남북관계 개선을 출구로 삼은 만큼 이번 고위급 접촉은 중요한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권경성기자 ficci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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