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하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아버지
“내일은 꼭 육성회비 들고 와라, 알겠제?”
우리 집은 가난했다. 육성회비 때문에 교무실로 불려간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우리 집이 조금만 더 부자였다면, 돈 많은 아버지를 만났더라면. 사춘기 시절의 가난은 세상을 원망하고 부모님을 향한 시선을 왜곡시키기에 충분한 질곡이었다.
# 아버지의 빈자리 채우느라 고생하신 어머니
아버지는 목수 일을 하셨다. 일의 특성상 돈을 벌 때는 벌지만 장마철이나 한겨울에는 일거리가 끊겼다. 나는 농사를 많이 짓는 집안의 아이들이나 부모님이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만큼이나 고생을 하셨다. 아버지는 공사 현장을 찾아다느니라 집을 비우실 때가 많았다. 어머니가 가장의 빈자리를 채웠다. 우리 삼형제를 낳고서 몸조리도 제대로 못했다고 하셨다. 특히 겨울에는 매일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셨다. 손등이 남자처럼 거칠었다.
80년 무렵 시골에 있는 얼마 안 되는 논밭을 팔고 셋방을 얻어 대구로 나온 뒤로도 어머니의 고생은 계속됐다. 아버지는 여전히 목수 일을 하며 전국을 떠도셨고, 어머니는 부족한 학비를 대려고 서문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다. 만두, 국수 등을 파셨는데, 어머니의 옷에는 늘 만두 기름과 간장 냄새가 배어 있었다. 피곤에 찌들어 코를 골며 곯아떨어지는 일상을 살면서도 어머니는 한번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네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분이다.”
나는 그때마다 마음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전쟁터에서 폭탄에 맞아 “죽여주시오!”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에 올라갈 무렵부터였다. 아버지가 이유 없이 자꾸 아팠다. 큰 병원에 입원해서 검진을 했더니 몸에 쇳조각이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가 내민 엑스레이 사진에는 하얀 점들이 박혀 있었다.
아버지는 참전용사였다. 6.25 때 3년 내내 총을 들고 싸웠다. 쇳조각은 전투 중에 몸에 박힌 것이었다. 바로 곁에서 폭탄이 터졌다고 했다. 굉음과 함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쇳조각으로 뼈를 긁어대는 듯한 통증이 몇날 며칠이나 이어졌다.
“제발 죽여 주이소. 아파가 못 살겠심더!”
아버지가 군의관에게 그렇게 애원했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몸에 파편이 박힌 채 살았으니 아프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비가 내리거나 찬바람이 불면 다친 자리가 시려서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핑계를 대지 않았다. 늘 일터를 찾아 다녔다. 어머니는 그런 사정을 잘 알고 계셨기에 한번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으셨고, 우리에게 늘 “아버지는 정말 훌륭한 분”이라는 교육을 시키셨던 것이었다. 결혼할 때도 어머니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처럼만 해라.”
#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자식들을 대하신 아버지
내가 아버지에게 가장 닮고 싶은 모습은 갓 도정(搗精)한 쌀처럼 정갈하고 맑은 말씀들이었다. 아버지는 어둡거나 부정적인 말들을 절대 입에 올리지 않으셨다. 젊은 시절 죽을 고생을 하고 거기다 병까지 안고 사셨으니 어둡고 원망기 그득한 표정으로 일관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겠지만, 아버지는 그늘 없이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한번씩 집에 오시면 늘 허허, 웃으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대했다. 당신에게 들이닥친 모든 질곡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신 듯하다. 어머니가 늘 아버지를 존경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신 것도 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마인드를 가진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에 결혼도 할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아내와 사귈 때, 처갓집의 반대가 심했다. 특히 장인어른이 “당장 헤어져라”고 다그칠 정도로 나를 탐탁찮게 여겼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가난한 집안에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청년에게 딸을 내주기란 어느 아버지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차가운 반응에도 실망하지 않고 인내와 끈기로 끝내 사랑을 쟁취했다. 결혼 후 10년 넘게 야간 대학을 다니면서 대학원까지 졸업한 뒤로는 사위들 중에서 나를 가장 든든하게 여기는 눈치다. 이것이 다 훌륭한 마인드를 심어주신 부모님 덕이라고 생각한다.
3년 전쯤에 부모님께 작은 선물을 하나 해드렸다. 칠곡 태전동에 아파트를 마련해 드렸다. 울진에 사실 때는 집을 가지고 계셨는데 자식들 교육 때문에 대구에 와서는 늘 셋방과 전세를 전전하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 명의로 된 집을 돌려드리고 싶었다.
젊은 시절에는 아무 것도 해드릴 게 없어서 늘 죄송했었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면서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효도를 받으셨으면 좋겠다. 부모님의 건강이 제일 큰 소망이다. *
◈ 아버지 윤영조(1932 ~ ) - 6.25 참전 용사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으며 지금도 몸에 폭탄 파편이 들어 있다. 평생 목痔舅?하면서 아내와 아들 셋을 키웠다.
◈ 아들 윤준수(1965 ~ ) - 대구사회복지법인어린이집 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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