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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술인의 시간] <58> 김재규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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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술인의 시간] <58> 김재규는 살아있다

입력
2014.02.11 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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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눈으로 보아도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경우들이 너무나 많다. 분명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되지 않는 상황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사람들은 주변에서 들은 말이나 언론 발표 내용에 대해 사실이라고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의 눈초리 또한 지우지 못하는 것 같다.

어찌보면 진실에 대한 욕구는 인간 생존에 대한 본능이요, 현대 문명을 이루게 된 큰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 조차도 든다. 그만큼 진실은 우리 삶에 있어 많은 도움이 되는 요소임에는 분명할 것인데 상황에 따라서는 진실은 허구에 의해 감춰지기도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마냥 좋아만 하지 않는 사람들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래서, 의구심이 많이 나는 어떤 사건이나 사안 뒤에 자주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음모론 (陰謀論, Conspiracy Theory)'이 아닐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모론' 에 대해 흥미는 있으나 다소 부정적인 인식 또한 함께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즉, 신뢰감이 떨어지니 믿기 어렵다는 의미인데 '케네디 대통령 암살', '영국 다이에나 전 왕세자비 죽음', '9.11 테러 배후 미국', '그림자 정부 프리메이슨' 등이 비교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음모론과 관련된 사건들이라 하겠다.

위 사건들과 관련된 음모론의 경우, 흥미로운 내용 임에는 분명하다. 이를테면, 케네디 대통령 암살자는 '하비 오스왈드(Lee Harvey Oswald)'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도 미국민의 절반 이상이 그가 진범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이니 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관련해서 분명 뭔가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라 하겠다. 따라서, 세월이 지나 어느 시기가 오면 이 사건은 다시 수면위로 떠 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필자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관련된 음모론을 보면서 자연스레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떠올려졌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가 쏜 권총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였고, 이 후 김재규는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그런데, 10.26 시해 사건은 우리나라 역사적 관점에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큰 사건이기에 역시나 이 사건에서도 '음모론'이 함께 대두 되었던 것 같다.

'김재규 단독 범행이 아니고 공범들이 있다', '치밀한 듯 하나 너무나 허술한 범행이었기에 평소 치밀한 그의 행동이라 보기 어렵다' 등 여러 의견들이 나왔었는데 필자의 관점에서 가장 큰 흥미로웠던 내용은 '김재규 CIA 내통설' '김재규 생존설' 이었다.

즉, '김재규는 미국 CIA의 후원과 지시를 받아 박정희를 제거한 후, 한국에서 사형 선고 받았으나 실제로는 사형집행 되지 않았고, 미군 공항을 통해 미 군용기 편으로 한국을 떠나 현재 미국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는 내용이었다.

오래전 위 내용을 보았을 때, 필자는 참으로 황당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혹자는 하와이에서 보았다는 사람도 있고, 혹자는 미국 동부 큰 도로가 있는 한적한 도시에 은둔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본 사람도 있다고 했다. 특히, 후자의 경우 김재규 다리가 좀 불편해 보였다는 표현이 있었을 정도이니 그를 매우 가까이에서 보았다는 의미였다.

음모론자 들은 '김재규 생존설'에 대해 나름의 논리를 폄으로써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1977년 미국은 한국정부에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17,000 여명의 병력과 미사일 기지를 철수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 안보상의 이유로 철군을 극구 반대했었지만 결국 관철되지 못했었고 카터 대통령과도 오히려 감정의 골만 더욱 커져갔다.

당시 북한은 사정거리 50Km 소련제 미사일을 갖추고 있었고 전체적인 전력 또한 우리나라에 비해 월등 했었기 때문에 미군을 철수한다는 것은 베트남에 이어, 미국이 남한을 북한에 그냥 넘기겠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는 우리나라 독자 생존의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변변한 미사일 하나 없었던 당시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오직 핵무장 만이 전력의 공백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당시, 미국에는 한국인 천재 핵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가 핵무장과 관련된 중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1977년 5월 21일, 그가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박 대통령에게 관련 기술을 넘겨 주었고, 1977년 6월 16일 미국 콜로라도 주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숨졌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 중심에 CIA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아 그 다음해인 1978년 8월 26일 우리나라 모처의 기지에서 한국국방과학연구소와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공동 제작한 중,장거리 유도탄발사 실험이 결국 성공했다. 외국의 도움없이 독자 개발한 것으로써, 이 날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일곱 번째의 유도탄 보유국이 풔?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써 대한민국이 핵미사일을 보유하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가 되었으니 미국 뿐 아니라 주변국들이 온통 적대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그런 시선에는 굴하지 않고 계속 핵개발을 독려했었는데 철군을 진행하던 미국이 철군을 중지하면서까지 박 대통령에게 핵개발 중지를 종용했고, 그에 응하지 않던 박 대통령을 결국 CIA가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며 결국 김재규를 통해 실행에 옮긴 것이다."

필자는 위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뭔가 말로 표현되지 않는 답답함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위 음모론이 사실인지 허구인지는 기문(奇門)으로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안은 그냥 알고 싶지가 않다.

왜냐하면, 만약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라면 아이처럼 펑펑 울고 있을 내 자신을 볼 것 같기에 그러하다.

역술인 부경(赴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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