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지 않고 누워있는데 북한에선 자주 맛보기 어려운 라면 냄새가 나더라고요. 남편이 끓여준 라면을 먹고 직장에선 특식인 개장국을 점심으로 먹었지요. 퇴근 후엔 여성 반장이 자기 집에 동네 여성들을 불러 모아 밤 11시까지 춤추고 노래 부르며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탈북 여성 손혜민(43ㆍ가명)씨가 2008년 평양에서 경험한 '3ㆍ8 국제부녀절'의 기억이다. 국제부녀절은 한국의 3ㆍ8 세계 여성의 날과 비슷한 기념일이다.
이화리더십개발원과 평화통일운동단체 조각보가 최근 서울 대현동 이화여대에서 연 '북한 이탈 여성들과 함께하는 초청 대화모임'에서 탈북 여성, 중국동포, 사할린 이주동포 등 '코리안 디아스포라'(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한인) 20여명과 한국 여성운동가들이 3월8일의 기억을 나눴다. 여성이자 주변인으로서 이중 차별을 받아온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공유해 연대를 다지자는 행사였다.
탈북 여성들은 북한의 3월8일은 여성이 1년에 단 한 번 남편이 차려주는 밥상을 받고 단축 근무를 하는 등 배려를 받는 날이라고 설명했다. 손씨는 "3ㆍ8절은 (체제와 성별의) 이중적인 사슬에서 벗어나 실컷 먹고 노는 날"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평소에는 차별에 시달린다고 했다. 50대 탈북 여성은 "3월8일을 제외한 평상시 여성은 직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가사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고 말했다. 30대 탈북 여성도 "북한 남성들은 '여성은 하늘이 남성에게 내려준 상궁'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닐 정도"라고 말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3월8일은 여성이 남성의 배려를 받는 날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참석자들은 입을 모았다. 중국 옌볜 출신 50대 여성은 "중국에선 3월 한달 내내 여성들이 먹고 놀고 즐기며 남성에게 장미꽃을 받기도 한다"고 말했다. 특히 한족 남성들과 달리 집안일을 거의 하지 않는 조선족 남성들도 3월8일만은 아내에게 아침상을 차려 주고 선물을 사준다고 박씨는 말했다. 러시아를 거쳐 현재 카자흐스탄에 사는 60대 이모씨는 "(여성 해방이라는) 정치적 분위기는 없어졌지만 지금도 이날은 남편에게 왕비 대접을 받고 자녀에게는 감사 편지를 받는 명절"이라고 말했다.
반면 여성계 주도로 1985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의 세계 여성의 날 행사는 여성 스스로 노동권과 정치참여, 모성 보호 등의 굵직한 이슈들을 다루며 권리를 신장한 '투쟁일'에 가깝다. 윤정숙 전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는 "3월8일 한국여성대회는 여성의 생존권, 인권과 평등을 요구하고 싸우며 대안을 모색, 실천하는 자리였다"고 말했다.
정경자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공대 여성학과 교수는 "사회주의권에선 남성들도 3월8일을 다 알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기념하는 날이라는 점이 놀랍다.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주류 문화권의)학자로서 다른 문화권에 근거 없는 우월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나 반성하는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미국의 열악한 작업장에서 여성 노동자가 화재로 불타 숨진 사건을 계기로 여성들이 궐기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1975년 유엔이 매년 3월8일을 기념일로 지정했다.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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