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위의 인생이다.’ 17.5인치(44.45㎝) 쇼트트랙 스케이트 날에서 그는 세계를 호령한 ‘차르’(황제)였다. 111.12m의 타원형 트랙은 궁전처럼 푸근했다. 오직 쇼트트랙 빙판 하나만 바라보고 10대~20대 초반 꿈 많은 시절을 보냈다. 전 세계의 빙판을 누볐고, 거침없이 달렸다.
안현수(29) 이야기다. 서울 신목고 1학년 때부터 그의 이름은 남자 쇼트트랙 계에 존재감을 과시했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땐 1,000m, 1,500m, 그리고 5,000m계주 3관왕에 올라 지존임을 과시했다. 2003년~07년까지 5년 연속 세계선수권 종합우승은 어떤가.
그러나 빙판 밖에서 안현수는 칼날만큼이나 ‘위험한 인물’로 통했다. 아니 그렇게 낙인이 찍혔다. 대한빙상경기연맹 파벌 다툼을 폭로했다는 괘씸죄에, ‘스승의 명을 받들지 않았다’는 갖가지 이유로 점차 눈밖에 나기 시작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왕따’를 당하는 등 몸살을 앓았다. 국내에서 그의 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2011년에는 소속팀 성남시청이 해체되는 날벼락까지 당했다. 이즈음 그는 자신을 버리기로 마음을 굳혔다. 대안은 외국 귀화였다. 미국과 러시아를 놓고 고민했다. 결론은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한 푸틴의 러시아였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빅토르 안이다. ‘승리하는 안현수’라는 의미다. 빅토르 안은 뼛속 깊이‘칼’을 갈았다.
빅토르 안, 안현수가 마침내 올림픽 무대에 섰다. 토리노 올림픽 이후 8년만이다. 새로운 국적 러시아 대표팀의 하얀색 유니폼을 차려 입고 출전한 안현수는 그러나 아무런 표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경기 전날 아버지 안기원씨(57)가 본보와 전화통화에서 “국적이 어떻든 간에 현수의 몸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그는 환호하는 러시아 관중들에게 잠시 손을 들어올리는 제스처 외에 일체의 불필요한 행동을 자제했다. 오직 경기에만 몰입했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수 만가지 감정이 교차했을 것이다. 가슴에는 태극마크가 아닌 러시아 국기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10일(한국시간) 오후 러시아 소치 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장은 경기 시작 수시간 전부터 백색, 청색, 적색의 삼색기를 손에 든 러시아 홈팬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결승 출발총성이 울리자 안현수는 여유 있는 듯 후미에서 세 번째로 빙판을 지쳤다. 그리고 예의 결승선을 앞두고는 웅크린 표범이 먹이를 잡아채듯 선두를 향해 날을 세웠고, 3위로 골인했다.
체력소모가 가장 많아 취약 종목으로 꼽히던 1,500m에서 메달 사냥에 성공한 안현수는 500m와 1,000m, 그리고 5,000m 계주에서도 메달 전망을 밝혔다.
소치=최형철기자 hccho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