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수도 아바나의 관광명소 아바나대성당 근처에 자리한 레스토랑 '라 모네다 쿠바나'는 라울 카스트로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개혁의 성과를 대변한다. 가게 주인 미구엘 앙겔라(39)는 정부의 자영업 허용조치에 따라 50년 동안 국유화됐던 할아버지의 가게를 3년 전 되찾아 운영하고 있다. 목이 좋은 데다 앙겔라가 여러 해 동안 관광공무원으로 일하며 쌓은 노하우 덕에 가게는 성업 중이다. 앙겔라가 지난해 낸 세금은 66만페소(2만6,400달러)로 200달러 안팎인 공무원 연봉의 100배가 넘는 액수다. 세금을 걷지 않던 사회주의국가 쿠바에서 앙겔라처럼 납세 의무를 지는 자영업자 수는 어느새 50만명에 육박했고 이들이 내는 세금은 국가예산의 2%를 차지한다.
쿠바는 지금 사회주의 혁명 이래 반세기 만에 최대 변혁기를 맞고 있다. 혁명동지인 친형 피델 카스트로로부터 2008년 국가평의회 의장직, 2011년 공산당 제1서기직을 물려받은 카스트로는 "자본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라 사회주의 발전을 지속하기 위한 것"이라며 본격적인 경제개혁 조치를 단행하고 있다. 공무원 100만명 감축안 발표, 178개 분야 자영업 허가, 외국인 국유지 임대기간 연장(이상 2010년), 부동산 및 차량 매매 허용, 농산물 직거래 허용(2011년), 해외여행 자유화, 자유무역특구 설치, 이중통화체제 폐지안 발표, 자동차 수입 허용(2013년)이 대표적 사례다. 올해 들어서도 주택ㆍ상가 임대와 택시 자영업을 허가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지난달 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국가공동체 정상회의 참석차 쿠바를 찾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쿠바는 중대한 변화 과정을 겪고 있다"며 개혁 성과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쿠바와 껄끄러운 관계인 서방 역시 쿠바의 변화 노력에 화답하고 있다. 반체제인사 탄압에 항의하며 쿠바에 10년 동안 외교관계 제한조치를 취해온 유럽연합(EU)은 10일 외무장관 회의에서 인권 관련 회담 정례화 등 쿠바와의 관계 개선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절박한 개혁 요구에 직면한 쿠바 경제
2005년 11월 피델 카스트로 당시 국가평의회 의장은 쿠바혁명의 실수로 인해 혁명이 실패할 수도 있음을 언급했다. 일 년이 채 지나가기도 전인 2006년 7월 피델 카스트로는 심각한 건강문제에 직면했고 결국 쿠바공산당 제2서기이자 국방부 장관인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이후 라울 카스트로는 경제에 대한 "구조적ㆍ개념적 변화"를 언급하면서 쿠바의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국민적 논의를 제안했다. 국민적 논의의 핵심은 일상생활에서 물자부족과 국가기구의 낮은 성과에 대한 비판이었다.
2008년 발생한 태풍 피해와 세계경제 위기로 인해 쿠바 경제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중요한 지원자였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해 경제적 위기는 더욱 심화됐다. 2011년 실질임금은 1989년의 26%였고, 쿠바에서 소비되는 식료품의 80%를 미국으로부터 현금을 지급하고 수입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스트로 형제는 현재의 쿠바 사회주의가 지속될 수 없음을 인식하면서 변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쿠바는 현재 변화를 모색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쿠바 경제의 위기는 앞서 1989년부터 시작된 동유럽과 소련의 붕괴로부터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1961년 피그만 공격, 이듬해 미사일 위기 상황에서 쿠바는 동유럽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에 가입해 설탕 수출을 위한 대체시장과 방어에 필요한 무기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동구권 붕괴로 COMECON에서 받아오던 원조가 대폭 축소되면서 쿠바 경제는 타격을 입었다. 한편 미국은 1992년 토리첼리법, 1996년 헬름스-버튼법 등 쿠바에 대한 투자ㆍ거래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며 경제봉쇄를 더욱 강화했다. 이로 인해 쿠바는 1993년 달러의 소유ㆍ사용의 합법화를 기점으로 경제개혁을 시작했다.
국민 요구 반영한 개혁조치
2010년 이래로 라울 카스트로는 경제적인 어려움 극복을 강조했다. 라울 카스트로가 국민적 논의를 제안했을 때 쿠바인들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했다. 정부기관의 합병을 통한 국가 규모의 축소, 사용하지 않는 국가 토지의 배분, 휴대전화를 비롯한 공산품 사용 허가, 미장원ㆍ이발소 등 소규모 민간사업의 허용, 노동자 점심 제공 같은 불필요한 사회지원의 폐지, 자영업을 위한 기회의 확대 등등.
2011년 4월 의회는 이 같은 국민적 요구를 반영해 쿠바경제의 장기적 문제해결을 위해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위한 기본계획'을 제정했다. 현행 경제개혁 조치들의 밑그림이라 할 수 있는 기본계획은 경제관리, 거시경제정책, 국제경제관계, 투자, 과학기술, 혁신, 사회정책, 농업, 산업, 에너지, 관광, 교통, 건설, 수자원, 교역 등에 대한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기본계획은 그러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를 보여주었지만 어떻게 그 목표를 성취할지에 대한 방법은 보여주지 못했다?지적을 받고 있다.
라울 카스트로가 집권한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쿠바정부는 농지의 15%에 대한 사용권을 14만6,000명의 농민에게 배분했고, 이보다는 적지만 조합노동자에게도 농지 사용권을 배분했다. 2010년 10월에는 생산성을 감소시키는 '초과 노동자'를 민간부문에 재배치하는 공무원 감축 작업에 착수했다. 공공부문의 초과 노동자는 1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총 고용의 20%, 국영기업 노동자의 30%에 해당한다.
"쿠바 개혁, 갈수록 탄력 붙을 것"
획기적인 개혁 조치가 쏟아지고 있지만 정부의 집행 의지는 이에 한참 못 미친다는 지적이 많다. 테드 헨켄 미국 시티대 교수는 "쿠바의 경제개혁 조치들은 하나같이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늘 암운이 드리워져 있다"며 "라울이 두 걸음 나아가다가 한걸음 물러서는 식의 '맘보'를 추고 있다"고 논평했다.
주목할 점은 쿠바 권력의 핵심이 정부가 아닌 극소수의 원로 인사들에게 있다는 점이다. 정당의 고위 지도자, 장관, 국가평의회 부의장 등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1950년대 말 시에라 산맥에서 혁명 활동을 했던 '역사적 엘리트'들로, 사회주의 체제를 옹호하며 급격한 개혁을 견제하는 보수주의 세력이다. 기술관료들은 역사적 엘리트의 위임에 따라 국가를 관리하지만 통치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현상은 라울 카스트로가 집권하면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2009년 펠리페 페레스 로케 국무장관, 카를로스 라헤 국가평의회 부의장 등 차세대 주자들이 해임되고 그 자리를 혁명원로 출신들이 차지한 것이 단적인 예다.
그러나 원로인사 대부분은 앞으로 5년 이내에 고령으로 사망하거나 일선에서 물러날 것이 확실시된다. 시장주의 요소 도입을 선호하는 기술관료들의 부상은 필연적이며 개혁정책 역시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쿠바의 경제개혁은 시장주의 도입을 통해 구매력과 물질적 조건을 향상하되 부의 재분배에 있어 국가가 주도적 역할을 유지하는 '시장사회주의'를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눈여겨 볼 점은 역량 있는 쿠바계 미국인들 역시 모국을 변혁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개혁 성과 관건은 미국의 제재 해제
라울 카스트로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9년 1월 "미국과 직접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화답하듯 오바마 정부는 그해 쿠바계 미국인의 쿠바 여행 및 송금 자유화 조치를 취했다. 카스트로는 2008년 국가평의회 의장을 맡기 전에, 오바마는 2008년 대선운동에서 똑같이 "예 할 수 있습니다"라는 구호를 애창했다. 양국 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다는 예측도 이런 해빙 분위기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지난해 12월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장례식에서 역사적인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양국 대외관계는 뚜렷한 개선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바마 정부의 쿠바 정책 역시 역대 정부와 마찬가지로 쿠바의 붕괴를 목표로 하고 있어 양국의 근본적 갈등 구도는 여전하다. 미국이 50년 넘게 유지해온 쿠바 경제제재 조치를 당장 해제할 것이라 보기 힘들고, 미국과 쿠바 정책을 공조해온 유럽 역시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은 많지 않다. 이런 조건에서 쿠바 경제개혁이 기대한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오바마 정부가 쿠바 정책에서 '채찍'보다는 '당근'을 중시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양국 관계가 개선될 경우 미국이 쿠바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가입을 유도할 가능성도 있다. 쿠바가 미국, 캐나다, 멕시코, 중남미, EU 등 거대한 시장과 연계된 NAFTA에 가입하면 그때 비로소 쿠바는 개혁ㆍ개방 정책의 획기적 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김달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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