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敗者)는 말이 없었다. 이승훈(26ㆍ대한항공)은 입을 다물었다. 마지못해 취재진에게 던진 말은 “죄송합니다”였다. 그렇게 그는 코치진과 함께 믹스터존(공동취재구역)을 황급히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승훈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기자들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이같이 말했다. 결기였는지, 자신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승훈은 8일(이하 한국시간)오후 러시아 소치 아들레나 아레나에서 열린 소치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0m 경기에서 6분26초61에 결승선을 통과해 12위에 그쳤다. 한국선수단에 첫 메달을 안겨줄 가능성이 큰 종목이어서 실망도 컸다. 이승훈은 4년전 밴쿠버 올림픽 이 종목에서 깜짝 은메달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실제 이승훈의 최근 기록도 주목할만했다. 지난해 11월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월드컵 1차 대회에서 한국신기록(6분07초04)을 갈아치우며 올림픽 메달 전망을 밝혔다. AP통신등 외신들도 그를 이번 대회 동메달 후보로 올려놓았다.
기록상으론 ‘3.5등’이란 분석이 우세했지만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인 만큼 이승훈의 경험을 높이 평가한 까닭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참혹했다. 자신의 최고기록보다 무려 20초 가까이 뒤진 ‘미스터리 레이스’였다. 경기 후 빙상 관계자들도 “(이)승훈이가 4,5등만 유지했어도 이해할 수 있는데”라며 탄식을 쏟아냈다. 한마디로 이해불가라는 의미였다. 대한빙상경기연맹 김관규 전무이사는 “초반에 속도를 끌어올려야 했는데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장기인 후반 스퍼트도 전혀 내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이승훈은 이날 3,000m 통과지점에서 챔피언 스벤 크라머(28ㆍ네덜란드)의 기록보다 6초 가까이 뒤처지더니, 3,800m에선 7.9초까지 밀려나는 등 오히려 후반레이스를 살리지 못했다.
이에 대해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었다’라는 평가가 있어 눈길을 끈다. 사소한 부분이 대사(大事)를 그르쳤다는 얘기다.
소치 올림픽 선수단 응원차 현지를 방문한 이에리사(새누리당)의원은 “승훈이의 심성이 곱고 착하지만 올림픽 은메달리스트로서의 자부심이 클 것이다. 때문에 코치진이 승훈이에게 휘둘린 감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탁구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오래 경험한 이의원은 이어 “(프로는)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트랙 한 두바퀴는 릴렉스하게 움직여줘야 근육이 풀어지는데 아쉽다”고 꼬집었다. 이의원은 또 “앞서 레이스를 마친 크라머가 6분10초76 올림픽 신기록을 작성한 것도, 이승훈을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시켰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곁에 있던 안민석(민주당)의원은 “몸을 푸는 과정에서 너무 무리하게 힘을 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사실 악재는 경기 시작 전부터 있었다. 출전선수 26명중 맨 마지막 13조에 배정됐기 때문이다.
상위 랭커 8명을 무작위로 뽑아, 마지막 조에 배정하는데 이승훈이 이에 ‘낚인’ 것이다. 반면 크라머는 빙판을 재정비한 뒤 열린 첫 번째 레이스를 타는 행운을 잡았다. 이승훈은 결국 3개조가 레이스를 마친 군데 군데 흠집이 파인 빙판을 달려야 했다.
한편 이승훈은 19일 스피드스케이팅 1만m와 22일부터 시작되는 팀추월 8강전에 나설 예정이다.
소치=최형철기자 hccho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