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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만화 동네는 진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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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만화 동네는 진화 중

입력
2014.02.07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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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이 포털사이트에 처음 등장한 게 2003년이다. 그로부터 만 10년. 현재 한국 만화는 제작 유통 소비 할 것 없이, 강산이 변한 만큼 달라졌다. 웹툰은 이미 대세다. 휴대폰은 전국민의 24시간 이동 대본소(만화방)가 됐고, 작가는 종이 대신 모니터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그림과 이야기를 구상해야 한다. 하지만 좁은 액정으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그림이 있고 감동이 있다. 그런 고민을 지고 새로운 길을 찾는 작가들이 있다. 그렇게 한국 만화는 더 깊이 다양하게 분화하고 있다.

신·구 작가 400여명 총출동 '만화같은 풍경'● 만화가협회 회장 뽑던 날웹툰 작가들 대거 가입으로 활기… 자신들 우상 만나 사인 요청도곳곳서 담소… "이런 분위기 처음"방통위 웹툰 심의 문제 대응 등 '젊어진 만협' 넘어야 할 난제 많아1월 25일 토요일 오후 2시 경기 부천시청 대강당에서 열린 제46차 한국만화가협회(이하 만협) 총회에서 이충호(47) 작가가 차기 회장에 당선됐다. 협회 사상 첫 웹툰 작가 회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원로 가운데 누군가가 때 되면 출마해 별 잡음 없이 뽑히던 관행도 깨졌다. 40대 신임회장은 스승 급인 50대 60대 후보들과 시종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오랜 도제식 전통으로 보수화한 만화계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훗날 누군가가 이날의 의미를 만화로 기록한다면 행사의 단상 못지않게 강당의 풍경에 더 큰 칸을 할애해야 할지 모른다. 비까지 추적추적 오던 이날 강당에는 백팩을 메고 머리를 염색한 젊은 작가서부터 화구통에 베레모를 쓴 기라성 같은 원로까지 400여 명의 만화가들이 운집했다. 의 김수정, 이현세, 의 윤태호, 의 강풀, 의 지강민…. 지금 10대들이 열광하는 스타 작가들도 저 멀리 대본소 시절서부터 자신을 열광케 했던 전설의 작가에게 주뼛주뼛 다가가 사인을 청했고 선배들은 즉석에서 그림 사인을 건네기도 했다. 신구세대의 담소와 덕담, 휴대폰 사진 촬영…. 총회는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시작될 수 있었다. 의 작가 이희재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사장은 "만화판에 40년간 있었지만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 화사한 분위기의 바닥에는 물론 팽팽한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기운은 사실 꽤 오래 전부터 부풀고 응집돼온 것이었다. 웹툰을 주무대로 활동하는 젊은 작가들은 만협의 무기력과 낡은 운영방식에 반발해 별도의 조직을 구상하기도 했다. 한 작가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는 취지로 혁신적인 작가조직을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기존 조직 내에서 개혁을 추진하자는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선거에 앞서 젊은 작가 256명은 지난해 11월 말 협회에 가입했다.

이날 오후 6시께 이충호 작가의 당선이 확정 발표되자 강당은 환호성으로 들썩였다. 만화 세대교체가 공식화하고, 새로운 플랫폼과 스타일의 신진 주류들이 정부와 시장을 향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마이크를 거머쥐는 순간이었다. 단상에 선 이 신임 회장은 "협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어서 협회가 어떤 덴지 알 수 있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2014년, 한국 만화계는 유래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2 만화산업백서'에 따르면 2009~11년 만화출판업 총 매출액은 3.5% 증가한 반면 인터넷만화 컨텐츠 서비스 매출액은 연평균 10.1% 늘었다. 증가 폭은 해마다 커지고 있다. 90년대 후반부터 만화가들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연재하던 스크롤 형식의 웹툰은 2003년 다음이 포털 사이트에서는 처음으로 웹툰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이제 한국 만화의 대표 형식이 됐다. 올해부터 네이버와 다음 등 포털 사이트들은 웹툰의 본격적인 해외 진출을 예고하며 k-pop에 이은 새로운 한류 문화 콘텐츠로 주목하고 있고, 인기 웹툰 작가는 연예인처럼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누린다.

1980, 90년대 출판 만화 작가들은 대부분 한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도제식 지도를 받다가 데뷔하는 이른바 '정통 코스'의 작가들이다. 그들의 스승 세대는 60,70년대 만화 시장의 주역으로 인쇄공장에서 찍어내는 100쪽 남짓의 대본소(만화방)용 만화를 주로 그렸다. 웹툰 작가들은 다르다. 그들은 인터넷에서 인기를 얻으면 곧장 스타작가가 될 수도 있다. 윤태호 작가는 "웹툰 작가 중에는 놀다가 갑자기 작가가 돼서 자신을 만화가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며 "웹툰 작가들을 보며 선배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만화계에 새로운 종족이 출현한 것 같단 느낌을 받곤 한다"고 말했다.

작품의 창작ㆍ유통 방식이 달라지면 작품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윤 작가는 "이말년 작가 등의 작품을 보면서 이것도 만화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처음에 많은 선배들이 '이것들이 만화를 뭘로 보고'했을 거다"窄?"과거 문하생 세대들은 자신들의 강점인 '그림'을 많이 그린다. 반면 지금 웹툰작가들은 그 사람들보단 그림을 못 그릴지는 몰라도 자기 작품이 가져야 하는 핵심적인 부분이 뭔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것 같다. 작가로 봤을 땐 핵심에 더 다가서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그 변화에 미처 적응하지 못해 작품 발표 공간 자체를 얻지 못하고 있고, 새로운 플랫폼의 복잡하고 불공정한 계약 관행의 피해를 입으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사례도 빈발했다. 만협의 혁신은 그래서 더 절박했다.

만화가 청소년의 미심쩍은 오락물로 통하던 1968년 한국아동만화가협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만협에 대한 작가들의 불만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원로작가 여성작가 스토리작가 등 직군별로 별도의 협회가 잇달아 만들어지면서 협회의 입지도 점점 약화해왔다. 그 와중에 2012년 2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24개 웹툰을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사전 지정, 웹툰 심의 문제가 터지면서 무기력한 만협의 개혁 요구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윤태호 작가를 주축으로 방심위심의반대를위한범만화인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가 만들어졌다. 독자 조직화 논의도 거기서 비롯됐다. 이 독자적인 흐름에 제동을 걸고 젊은 웹툰 작가들을 대거 협회 안으로 끌어들인 것도 이 신임 회장이었다.

그와, 새롭게 출범한 만협에 거는 회원들의 기대와 요구, 의구심과 알력은 그래서 엄청날 수밖에 없다. 감당해야 할 문제 역시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날 총회의 2013년 사업 보고에서는 기존 만화 출판사들 대신'네이버'가 끊임없이 호명됐지만 참석자의 절반은 웹툰과는 무관한 작가들이었다. 김낙호 미디어 연구가는 "만화 창작 노동 실태조사 정례화와 분쟁 실태 자료모음 등 구체적인 근거를 모으는 작업서부터 만화의 날을 보편적인 축제일로 발전시키는 작업 등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웹툰엔 왜 '콩닥콩닥' 순정 만화가 없을까● 출판 만화서 웹툰 시스템으로웹툰 독자들은 빠른 템포 선호… '발라드 같은 느낌' 영역 비좁아독자와의 소통 방식도 변화…팬레터에서 악플 많은 댓글로최근엔 모바일 '카툰컵' 등장 "새로운 변화 속 새로운 시도"

만협 개혁의 주역으로 꼽히는 이충호 작가와 윤태호 작가는 한국 만화의 허리 세대에 속한다. 이들은 출판 만화로 시작해서 웹툰 시스템으로 옮겨간 전환 세대이기도 하다. 김낙호 미디어 연구가는 "이충호와 윤태호는 기존 연출 방식을 전환하면서 완전히 다른 플랫폼인 출판 만화와 웹툰 양쪽에 모두 적응한 대표적인 작가"라고 평했다. 두 작가는 모두 문하생 생활을 거쳐 1990년대 초반 데뷔했다. 2000년대 초반 잡지 만화 시장과 결별한 두 작가는 학습만화와 신문 만화 등을 거쳐 2007년 포털 사이트 다음에 웹툰 연재를 시작했다. 두 작가 모두 "독자와의 소통이 너무 그리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출판 만화가가 웹툰 시장에 진입하는 게 그들처럼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우선 서사의 전개 형식부터 다르다. 페이지를 옆으로 넘기면서 보는 '횡'의 출판만화와 달리 웹툰은 마우스 스크롤 방식의 '종'의 세계다. 이충호 작가는 "단순하게 보면 끊어짐과 이어짐의 차이다. 만화책은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가고 페이지를 넘기는 과정에서 시선이 단절되기 때문에 액션의 박진감을 연출하기 좋다. 하지만 스크롤 방식은 쭉 이어지기 때문에 어디서 끊을 곳이 없으니 정서적인 부분과 감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림이나 대사의 전달 기법도 고민해야 한다. 웹툰에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 많이 연출되는 것도 그 때문인데, 반복적인 화면을 이어서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충호 작가 역시 출판만화에서 즐겨 그리던 호쾌한 액션 장면 대신 웹툰에서는 동영상의 슬로모션 액션을 모방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아래로 이동하는 독자의 시선을 의식해, 고층건물의 위에서 아래로 추락하며 싸우는 장면 등을 의도적으로 삽입, 수직적 이동 감각을 극적으로 강조하는 식이었다.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으로 접하는 웹툰에서는 그림보다는 아이디어와 스토리가 더 중시된다. 윤태호 작가는 "첫 웹툰 연재작인 를 연재할 때 웹 스크롤에 맞춰서 작업했는데, 연재를 끝낸 뒤 단행본으로 출판하면서 말풍선을 컷 안에 배치하다 보니 그림의 균형이 깨져 단행본 완성도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다음 작품인 때는 컷 안에 그림과 말풍선이 모두 들어가는 페이지 방식으로 작업을 먼저 하고 이를 하나하나 잘라 웹 스크롤 방식으로 재편집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말풍선이 많아지면 그림이 상대적으로 작아지는 문제가 있었지만, 15페이지씩 주 2회 연재를 하는 상황에서는 취하고 포기할 걸 정할 수밖에 없다. 미생을 보는 독자층의 연령이 높으니 그림의 디테일보다는 내용의 심도에 포커스를 맞춰 스토리 위주로 가고 그림은 큰 욕심 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난제는 기술적 측면뿐만 아니다. 독자와의 소통 방식도 달라졌다. '악플(비난 댓글)'이라는 복병과도 부딪쳐야 했다. 이충호 작가는 "잡지에 만화를 그리던 당시엔 정성스럽게 쓴 팬레터만 받아 농담으로 이야기하면 내가 신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웹툰은 '선플(칭찬 댓글)'이 1개면 악플이 100개인 공간. '재미없다' '그림 못 그린다'부터 원색적인 욕설까지, 마치 맥주병이 경기장 안으로 날아들어오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실제로 웹툰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달린 댓글에 많은 신경을 쓴다. 한 만화계 관계자는 "웹툰 작가들 중에는 독자의 반응을 보고 앞으로의 작품 방향을 결정하는 작가들도 있다. 유료 만화 앱인 '레진코믹스'가 댓글 기능을 만들지 않았더니 일부 작가들이 레진코믹스에 댓글 기능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한 출판만화 작가는 "인기 만화는 독자의 생각보다 한 두발 나와서 이끌어줄 때 나오게 된다. 독자 취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다 맞춰주겠나"고 말했다.

90년대 순정만화 작가들은 어디로 갔을까

섬세하고 서정적인 선으로 두 페이지 가득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 느리고 잔잔한 호흡으로 이어지는 서사. 1990년대 한국 만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또 다른 장르가 순정만화였다. 하지만 순정만화의 주역들을 웹툰 시장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몇몇 작가들이 웹툰 연재를 하지만 화제작은 나오지 않았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는 "순정만화의 세밀하고 유미적인 선은 디지털로 전환되면 깨지기 쉽다. 디지털로 넘어와도 순끼 작가의 식으로 바뀌고, 그림 측면에서도 추혜연 작가의 정도가 한계다. 그 만화들은 80, 90년대의 순정만화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과 의 신일숙 작가는 "순정만화는 클래식 음악이나 발라드 같은 느낌의 느린 템포로 감정을 계속 이어가는 방식이지만 웹툰 독자들은 매회 사건들이 이어지는 빠른 템포를 기대하기 때문에 순정만화가 웹툰에서 영역을 확보하기 어려운 것 같다. 웹툰에 맞췄다가는 출판을 살리기 힘들고, 그렇다고 출판에만 매달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 고민들이 많다. 아예 학교나 회사로 직장을 옮기거나 적응을 못해 일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국내의 왜소해진 출판 만화 시장 상황에서 웹툰으로 전환하지 않고 아예 일본 등 해외 출판 시장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있다. 과 의 박성우 작가는 2004년부터 일본 잡지에 작품을 연재해 오고 있다. 박성우 작가가 그림을, 임달영 작가가 스토리를 맡은 은 일본에서 1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고 2009년엔 한국 작가 작품 중 처음으로 애니메이션으로까지 만들어졌다. 박성우 작가는 "일본 진출은 야구선수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려는 심리이면서 사양 시장인 한국 출판만화 시장에서 도피하는 의미도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50여명의 한국 작가가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경력을 쌓고 일본으로 가던 과거와 달리 처음부터 일본에서 작가 생활을 시작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박 작가는 "만화는 냉정하게 말해서 서브컬처(하위문화)다. 서브컬처답게 흔하고 싸야 한다. 일본에서는 컵라면을 하나 사서 편의점에서 먹으면서 심심하니까 만화 잡지 넘겨 보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나는 90년대 만화 중흥기에 데뷔해서 덕을 본 세대인데 그 당시 학교 앞 문방구에서 만화를 팔던 것과 흡사한 풍토다"라고 말했다.

만화 리뷰 사이트 에이코믹스의 김봉석 편집장은 "전체 만화시장에서 웹툰이 80% 이상을 장악한 상황에서 기존 출판 시장 만화가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엄청나다"며 "고교생이 아이디어 하나로 개그 일상물을 그려서 인기가 좋으면 포털에 연재해 원고료를 받는데, 문하생도 있고 그림의 퀄리티도 높은 기존 출판 작가는 웹툰에 연재하며 들이는 시간과 노동력에 비해 원고료가 너무 낮다"고 지적했다.

잡지 만화를 그대로 모바일에 옮긴 스마트폰 앱도

과거 종이 잡지 형태로 우리 곁에 있었던 '싸고 흔한 만화'가 지난 해 10월 스마트폰 앱으로 등장했다. 모바일 만화 잡지 '카툰컵'이다. 카툰컵은 웹툰과 달리 '작가 스타일에 맞추는 플랫폼'을 표방한다. 작품을 스크롤 형식뿐 아니라 기존 출판 만화가들의 방식인 페이지 형식과 컷 하나하나씩 볼 수 있는 '컷뷰'를 지원해 모바일 화면의 페이지 연출 한계를 극복하도록 한 것이다. 또 개별 작품이 아니라 매주 여러 작가의 작품을 싣는 잡지 형식을 모바일로 전환해 유료로 다운받아 볼 수 있도록 했다. 현재 신일숙 작가와 박성우 작가, 박소희 작가 등 12명의 중견 작가들이 카툰컵에 매주 최소 12페이지씩 작품을 연재하고 있다. 카툰컵 성지영 이사는 "지금은 기성세대가 돼서 만화와 멀어졌지만 양질의 작품이 있으면 돌아올 수 있는, 가볍게 만화를 즐기는 3040독자를 만나고자 한다"고 말했다. 현재 회원은 1만 2,000명 정도. '미리보기'로 3페이지를 본 뒤 호당 1,200원을 내고 유료로 전환하는 비율은 30%가 넘는다고 했다. 스크롤 형식이 보편화한 모바일에서의 페이지 형식과 컷뷰 형식이 정착되려면 아직 기술적으로 개선돼야 할 점들도 있다. 박성우 작가는 "컷뷰가 습관이 안돼서 페이지뷰로 만화를 봤는데 스마트폰 같은 작은 사이즈에서 페이지뷰로 보기엔 불편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신일숙 작가는 "종이 원고에서 모바일로 발전했듯 이걸 넘어서서 스크린을 펼쳐서 만화를 볼 수 있는 등 기술적 발전은 계속 이뤄지지 않을까"하고 말했다. 작가들은 이렇게 웹툰의 압도적인 흐름에 저항하고 편승하면서 독자적인 작은 물줄기들도 만들어가고 있다.

소설만큼 깊이 있는 만화, 주목받는 '그래픽 노블'● 외연 확장하는 만화세계웹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주제 현대사·철학·분쟁·인생 등 다뤄만만찮은 분량·가격에도 높은 판매고작년 '설국열차' '담요' 등 인기… 소설과 만화, 만화와 회화 콜라보도직장인 A씨는 틈날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본다. 다양한 장르의 만화가 모여있는 웹툰은 짧은 시간의 기분 전환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출근길에서든 화장실에서든 웹툰은 A씨의 일상 틈새를 파고 들었다. 하지만 학창시절부터 연애 액션 스포츠 SF 역사물 등 다양한 만화를 읽어온 A씨로서는 뭔가 부족하다는 갈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포털 사이트에 연재되는 웹툰의 타깃 연령대는 네이버가 10대, 다음이 10대~20대 초반이다. A씨처럼 만화를 보고 자란 20대 후반 이상이 보고 즐길만한 진지한 주제의 만화가 부족했다. 최근 급격히 성장한 유료 만화 앱인 '레진코믹스'도 종종 이용하지만 성인용 연애물이 많다. 모바일의 작은 화면도 갑갑했다. 두 페이지 가득 펼쳐진 그림에 압도되던 감동도 그리웠다.

그러던 어느 날 A씨는 한 카페에 비치돼 있던 를 읽게 됐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를 흥미롭게 본 터라 원작 만화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겉으로 봐선 만화책이란 것을 모를 정도로 크고 두꺼운 책이었다. 조밀한 컷과 그림체가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봐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소설책 한 권을 읽은 것 못지않은 포만감. A씨는 이런 만화를 '그래픽 노블'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픽 노블은 만화의 형식을 빌리지만 소설처럼 길고 복잡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다. 이야기가 완결되는 구조의 만화책을 그래픽 노블, 배트맨이나 슈퍼맨처럼 시리즈로 이어지는 만화는 코믹스로 구분하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경험한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그려 1992년 만화가 사상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아트 슈피겔만의 를 그래픽 노블의 시작으로 본다.

한국에서 그래픽 노블은 기존의 만화 출판사가 아닌 인문 예술서 출판사들이 주도적으로 출간해왔다. 2005년 민음사의 시각문화 전문 브랜드 세미콜론과 같은 해 열린책들의 예술 전문 출판사 미메시스 등에서 미국과 유럽의 그래픽 노블을 독자에게 선보이기 시작했다. 세미콜론 관계자는 "비주얼과 스토리 양면의 '혁신성'을 중요하게 고려한다. 출간 당시 혁신성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은 클래식들과 신선한 최근작을 함께 주목한다"고 출간 기준을 밝혔다. 열린책들의 그레고리 림펜스 기획팀 팀장은 "전체 도서 시장에서 만화가 30% 가까이 차지할 정도로 만화의 힘이 가장 강한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미의 작가들을 많이 소개한다"고 말했다.

2013 그래픽 노블 저변 확대 원년

2013년은 새로운 만화에 목마른 독자들이 그래픽 노블을 발견한 해였다. 프랑스 작가 장 마르크 로셰트와 자크 로브의 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인기에 힘입어 단기간에 2만 1,000부라는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소년의 성장과 연애를 같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룬 미국작가 크레이그 톰슨의 는 2012년 11월에 나와 지금까지 2만 부 가까이 팔렸다. 평균 그래픽 노블의 판매량이 만 부에 미치기도 힘겨웠던 것을 감안하면 단기간에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셈이다. 수영장을 배경으로 한 소년의 풋사랑을 그린 프랑스 작가 바스티앙 비베스의 은 2009년 국내에 처음 소개돼 지금까지 1만부가 팔린 스테디 셀러. 이후 등 작품으로 국내 독자층을 넓혀온 그는 작년 부천국제만화축제 때 내한하기도 했다. 박인하 교수는 "지금은 어느 때보다 만화를 많이 보는 시대가 됐지만 웹툰은 오락 수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출판 만화는 학습만화에 치중하는 형편이었다. 2010瘦沮嗤?해도 한국에서 성공할거라 예상 못한 나 같은 몇 만원짜리 책들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만화에 대한 진지한 독서 욕구가 확인됐다"라며 최근 그래픽 노블의 대중화를 설명했다.

그래픽 노블은 소비 역시 기존 만화와 다른 방식으로 이뤄진다. 일반적인 서점 외에도 '펀샵'과 같은 인터넷 사이트와 시각예술 전문 서점인 '땡스북스', 카페, 패션 편집샵 등이 어우러진 '1984'와 같은 20대 이상의 취향에 맞는 복합문화공간에서 사랑 받는다.

그래픽 노블의 주제는 다양하고 깊다. 처럼 개인의 성장과 사랑을 다루기도 하고, 마르잔 사트라피의 처럼 이란 현대사와 작가의 인생을 병치시킨 자전적 만화도 있다. 자신이 체류한 도시의 생활상을 관찰한 작품 등을 발표한 캐나다 작가 기 들릴은 성지 예루살렘의 모습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자세히 다룬 으로 2012년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에서 최고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 만화 작품 중에도 그래픽 노블로 분류되는 작품들이 있다. 로 데뷔한 최규석 작가는 등의 작품으로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의 앙꼬 작가 역시 일본 만화 장르법칙에서 벗어나면서 개성을 살린 만화로 주목 받는다. 주로 외국 작품을 소개해 온 출판사 미메시스도 올해 권용득 작가의 작품과 한국 작가 6명의 작품을 모은 단편집을 소개할 예정이다.

문예만화 전문잡지도 창간

'어른들을 위한 만화'를 표방하며 ?전문적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도 있다. 지난 달 20일 창5?계간지 '이미지 앤 노블'은 풍부하고 예술적인 시각연출과 문학적 깊이의 서사를 담은 만화를 '문예만화'로 정의하고 만화와 일러스트레이션, 소설 등을 담았다.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자인 소설가 편혜영씨의 대표작 를 만화가이자 영화감독인 변병준 작가가 만화로 만든 작품 등 소설과 만화의 콜라보레이션도 시도했다.

1995년 발표된 최호철 작가의 '을지로 순환선'은 가로 2m가 넘는 화면에 지하철 안팎의 풍경을 세밀하게 담고 있다. 회화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만화 그림과 이야기, 연출이 모두 포함돼 있다. 컷과 대사만 없을 뿐이다. 경기 하남시 자택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이미지 파일을 열어 2009년 발표한 전태일 열사의 삶을 그린 만화 중 한 장면을 보여줬다. 에서 전태열 열사의 분신 장면을 카메라를 들이댄 것처럼 360도를 따라 돌며 재현하는 방식으로 작업한 그림이다. 마우스를 움직여 공간을 이동할 때마다 마치 내가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을 준다. 정작 책에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 최호철 작가는 "원근감을 너무 사랑해서 이런 작업도 하긴 하는데, 책으로 내면 재미가 없고 디지털로 봐야 재미있는 작업"이라며 "이런 시각으로 역사적인 장면을 재구성한 그림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독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만화의 외연은 꾸준히 확대되고 있다.

올해로 41회째를 맞은 프랑스 '앙굴렘 국제 만화 페스티벌'은 세계 최대의 만화 축제로, 한국은 2003년 첫 한국만화특별전을 치른 후 지속적으로 참가하며 한국 만화를 소개해왔다. 지난 달 30일부터 지난 2일까지 이어진 행사에서 한국은 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작품 '지지 않는 꽃'을 전시했다. 이현세 오세영 최인선 박건웅 김정기 등 만화가 19명의 작품이 전시돼 1만 7,000여명의 관람객을 모았다.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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