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서울고법 민사2부(부장 조해현) 재판부가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는 무효라는 판결문을 읽어내려가자 해고노동자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 박수가 터져나왔고 크게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해고 노동자 153명 중 이날 재판에 참석한 이들은 30여명. 이들은 지난 5년간의 고난을 상징하듯 '어려워도 끝까지, 지금처럼 손잡고'라고 쓰여진 피켓을 흔들며 서로 축하했다.
이창근(41) 전국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 정책기획실장은 판결에 대해 "경영상 긴박함을 이유로 정리해고를 단행해 온 많은 자본 집단들에게 법원이 제동을 건 것"이라며 "이 판결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무분별한 정리해고에 경종을 울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소감은 무거웠다. 그는 "1,341일간 싸움을 이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슬프게도 숨져간 동료들의 죽음인 것 같다. 우리는 동료들의 관 뚜껑 위에서 기쁜 소식을 들었기에 기뻐도 기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싸움은 길고 험난했다. 2009년 4월 사측이 2,646명 구조조정 계획을 통보한 후 5월 노조는 평택공장을 점거하고 파업을 시작했다. 사측은 음식물 반입을 막고 가스를 끊었으며 경찰은 강제진압에 나섰다. 결국 980명 정리해고 대상자를 무급휴직 462명, 희망퇴직 353명, 정리해고 165명으로 조정하는 것으로 노사협상이 타결됐다.
이후 쌍용차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비극은 본격화했다. 2009년 4월 비정규직인 오모씨가 자살한 후 지난해 1월까지 24명이 퇴직 후 생활고에 시달려 자살하거나 스트레스 등으로 병을 얻어 사망했다. 해고자들은 취업을 하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렸다. 이날 재판에 해고 노동자들이 30여명밖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승소를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생계에 내몰린 것이 더 큰 이유다. 낮에는 일용직 노동을 하고 밤에는 대리운전 기사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해고되지 않았다고 해서 죽음을 비켜가진 못했다. 동료들의 고통을 지켜보기 힘들어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이 실장은 동료들의 죽음에 대해 "생계 문제나 억울함 등의 문제는 개인이 혼자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던 데다 투쟁 과정에서 쌓인 억울함이 죽음으로 번져간 것 같다"고 해석했다.
더구나 장비 손상을 이유로 회사(33억원)와 경찰(23억7,000만원)이 제기한 손해배상은 더욱 이들을 짓눌렀다. 사망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서울 정동 대한문 앞에 차린 분향소에 대한 경찰과 자치구의 부당한 탄압은 해고 노동자를 두 번 죽였다. 복직과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2012년 11월 3명의 노조원들이 쌍용차 평택공장 앞에서 송전탑 고공농성에 돌입했지만 복직 약속은 얻어내지 못한 채 건강 악화로 171일만에 내려와야 했다.
투쟁 과정 중 가장 힘들었던 시점에 대해 이 실장은 "우리 투쟁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없었고, 사회적으로 노조를 폭력집단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던 2010년"이라며 "무엇보다 생활고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갈 길은 멀다. 해고 노동자들의 밀린 임금 지급, 경찰과 사측이 제기한 손해배상 가압류,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에 대한 구상권 문제 등 법적 문제뿐 아니라 지금까지 희생된 24명의 조합원들의 문제를 어떻게 풀 지도 문제다. 쌍용차 지부 관계자는 "재판부가 판결하면서 빠른 시간 안에서 해결했으면 좋겠다고 한 것을 회사가 새겨들어야 한다"며 "노사가 교섭을 통해 갈등을 풀고 상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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