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미국 버지니아 주도인 리치먼드 의사당의 하원 전체회의실. 낮 12시 45분 교과서 동해병기법안(HB11)이 상정되자 회의실 안은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샌드위치, 감자칩을 먹으며 한가롭게 의사일정을 지켜보던 의원들 자세부터 달라졌다.
기다렸다는 듯 법안을 발의한 티머시 휴고 의원과 한국계 마크 김 의원 등 4명의 찬성 발언이 잇따랐다. '한인의 친구'로 떠오른 휴고 의원은 "2000년 넘게 사용되던 동해가 일제에 의해 사라졌다"며 이런 역사를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호소했다. 마크 김 의원은 일제시대 태어난 부모님이 한국 이름마저 쓰지 못한 이야기로 한국의 아픈 역사를 소개했다. 그는 "일본해만 표기된 교과서는 재미동포들에게 나라를 잃은 역사를 연상시킨다"는 논리를 폈다. 이에 조니 조아노 의원은 그리스계 이민자임을 밝히고 "동해 병기는 이스탄불과 콘스탄티노플을 병기해야 한다는 논리와 같다"며 반대했다.
오후 1시, 표결 선언 직후 전자투표가 진행되면서 분위기는 다시 팽팽해졌다. 그러나 의사당의 찬성 분위기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하원 100석 가운데 67석을 차지한 공화당 의장과 당서열 1~3위의 지도부, 민주당 대표까지 법안 상정의원에 이름을 올린 상태였다. 최종 숫자는 찬성 81, 반대 15. 의원 5분의 4가 찬성한 일방적 투표였다.
전광판을 지켜보며 법안 통과를 확인한 방청석의 한인들은 그러나 침착했다. 만세를 부르지도, 태극기를 흔들지도, 감격해 서로 껴안지도 않았다. 일본을 자극하지 않도록 애써 마지막까지 차분히 대응했다.
지난달 상원에 이어 하원에서 법안이 통과됨에 따라 법안은 주지사 서명 절차만 남았다. 일본의 마지막 방해공작이 우려되지만 상ㆍ하원에서 3분의 2 이상이 찬성한 만큼 상황을 뒤집기는 불가능하다. 서명 약속을 공개한 테리 매콜리프 주지사는 늦어도 3월초까지는 법안에 서명할 것으로 보인다. 법안이 발효되면 미국의 초중고교 새 학기가 시작되는 9월부터 동해와 일본해가 병기된 교과서가 버지니아주에 배포된다. 버지니아 교과서를 공동 사용하는 주변 6개 주에서도 같이 동해병기된 교과서로 가르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법안 통과는 미국 정치에서 로비보다 유권자의 표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버지니아 한인 15만명 가운데 투표권이 있는 사람은 8만2,000명으로 일본(1만9,000명)에 비해 4배 이상 많다. 한인 표는 대표적인 경합주(스윙스테이트)인 버지니아의 정치적 색깔은 물론 주지사 당락도 바꿀 수 있는 규모다. 매콜리프 주지사의 경우 지난해 11월 선거에서 불과 6만표 차로 당선했다. 이날 하원의원들이 투표에 앞서 한인들의 정치력 신장을 인정하며 기립박수를 한 것도 표의 위력을 유감 없이 보여준 것이다. 현지 언론인은 "한인들이 뭉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정치적 자각을 한 것이 더욱 값지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동해 병기 반대로비에 나서면서 이번 사안은 한일 외교전으로 비화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돈을 앞세운 로비와 주미 대사의 협박성 편지로도 수성에 실패했다. 이뿐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과 위안부 기림비, 연방정부 통합세출법의 위안부 관련 조항, 조지아주 의회의 동해표기 결의안 등 미국 내에서 최근 잇따른 한일 역사전쟁에서 대부분 패배를 당해 충격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날 취재 현장에서 만난 일본 특파원들은 동해병기 법안이 통과되자 낙담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리치먼드(버지니아주)=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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