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이라고 해도 좋고 30년이라고 해도 좋다. 하나의 기업에서 백혈병 환자가 151명 발생했고 그 중 58명이 사망했다면, 그걸 그 기업에서 하는 일과 무관하다 할 수 있을까. 나도 전공이 사회학인지라 통계학적으로 사고하는 법은 조금 아는데, 그에 따르면 이런 일은 결코 정상적인 게 아니다. 더구나 백혈병은 흔한 병이 아니고 쉽게 걸리는 병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연간 수조원의 이윤을 남기는 걸 자랑삼는 그 회사(잘 알다시피 '최고의 기업'이라는 삼성반도체다)는 그 사실을 묻으려 했고, 돈으로 매수하려 했으며, 그걸 아는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다. 회사의 명예가 걸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얄팍한 계산의 논리를 적용한다 해도, 그 '비용'과 그 정도의 노력을 병의 발생이유를 찾아내고 환자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데 썼다면 당사자뿐 아니라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을 것이다. '역시 삼성이야!'라고 감탄했을 것이고, 병의 발생으로 인한 '명예훼손'보다 훨씬 큰 명예를 얻었을 것이다.
이 '최고의 기업'은 일하다 죽은 사원들의 죽음에서 무엇을 보는 것일까. 그런 병이 발생했다는 유감스런 사실, 그 사실로 인해 회사에게 주어질 비난과 불명예, 아니 자기가 떠안아야할 책임 같은 것이었을까? 그래서 그 사실이 알려지는 걸 막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썼던 것일 게다. 잘 안 풀린다 싶었을 때에도, 배상금의 액수를 크게 올려주면 될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아마 그렇게 해결한 경우도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병원에서 돌아오는 자신의 택시 안에서 죽어간 딸을 묻어야 했던 아버지가 그 죽음에서 어찌 그들과 똑같은 것을 보았을 것인가. 20의 나이, 그 빛나는 청춘의 꿈과 희망이 안타까웠을 것이고, 대학 대신 취직을 선택하게 했던 자신의 빈곤이 원통했을 것이며, 좋은 기업 취직했다는 기쁨이 죽음으로 귀착된 것에 절망했을 것이고, 그 가슴 아픈 죽음을 돈으로 사고자 하는 회사에 열받았을 것이며, 마땅한 모든 항의를 묵살하기 위해 취해진 수많은 비겁한 짓들에 분노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운전석 뒤에서 이미 싸늘하게 식은 딸의 시신을 안고 약속한다. 너의 이 안타까운 죽음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는 인생을 건다.
진실이란 흔히 생각하듯이 그저 우리 눈길이 닿으면 충분한 거리 저편에, 땅 속에 묻혀 발굴을 기다리는 광물처럼 저기 있는 게 아니다. 진실은 오히려 세상 어디에도 자리를 갖지 못한 채 있다. 있어도 보이지 않는 묵살의 어둠 속에 갇혀 있는 것이고, 드러나도 보이지 않게 하려는 어떤 힘에 의해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파헤치고 찾아내고 보이게 하며 쉬 사라지지 않게 새겨놓으려는 일관된 노력을 통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것을 드러나게 하고 보이게 하겠다는 굳은 약속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예전에 니체는 "약속할 수 있는 자가 되라"고 권한 바 있다. 약속할 수 있다함은 책임질 수 있음을 뜻한다. 그건 하지 못할 일에 대한 허언이나 하지 못한 일에 대한 가책 같은 게 아니다. 심지어 충분히 지킬 수 없을지 모를 막막함 속에서도, 그것을 지키지 위해 자신을 거는 것이다. 진실이란 그 약속이 향해 가는 목적지의 이름이다. 그 약속은 진실을 매장하려는 이 세계와 다른 세계에 대한 약속이다.
지금도 반복되는 매장의 시도와 대결하며 상영관을 찾아가고 있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딸의 죽음을 두고 서약해야 했던 한 아버지의 가슴 아픈 약속이, 진실을 매장하려는 지금의 세계와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향한 약속임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 영화 자체가 그 아버지의 약속과 손잡은 '또 하나의 약속'임을 보여준다. 이런 약속, 이런 우정은 얼마나 희소한 것인지.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이런 약속, 이런 우정이 없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것이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기초교육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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