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얄밉다. 미국 말이다. 뒷간에 들어갈 때랑 나올 때가 어찌 그리 다른지. 없는 나라가 그러면 그래도 눈감아 줄 텐데, 있는 나라, 그것도 잔뜩 가진 나라가 그러니 더 그렇다.
아마 세계 각국 경제부처 관계자들과 금융시장 참가자들은 지난 달 30일 새벽 Fed만 쳐다봤을 것이다. 설 연휴 초입임에도 우리 정부 관계자들도 밤잠 설쳐가며 비상근무를 할 정도였다.
결과 자체가 대단한 관심은 아니었다. 어차피 100억달러 추가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 경기지표가 장밋빛 일색이었으니(이후 발표된 제조업지수는 좋지 않았지만), 중앙은행이 돈줄을 죄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한달 전에 좌회전 깜박이를 켜놓고 직진을 한다면(한국은행이 종종 그랬던 것처럼) 욕 먹을 일이었다.
그래도 신흥국 위기에 대해 한 마디 언급은 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감은 있었다. 미국은 기축통화국이고, Fed는 세계의 중앙은행이니까. 그게 아니라도 신흥국 위기에 방아쇠를 당긴 게 그들의 테이퍼링 조치니까.
하지만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Fed가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뒤 내놓은 A4 용지 한 장 반짜리 성명서 어디에도 테이퍼링 공포에 떠는 신흥국 얘기는 없었다. 고용지표니, 실업률이니, 가계지출이니, 주택시장이니 온통 자기들 얘기뿐이었다.
심지어 리처드 피셔 댈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FOMC 회의 뒤 한 연설에서 회의 결과를 목 빠져라 쳐다봤던 신흥국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일부는 연준이 세계은행이며 그에 맞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믿지만, 연준은 미국의 중앙은행일 뿐이다. 다른 나라들도 각자 책임 있는 중앙은행이 있고 이에 맞는 역할이 있지 않느냐." 그는 아예 특정 국가를 콕 집어서 살생부까지 썼다. "폴란드와 멕시코처럼 값싼 자금을 자국 경제구조 개혁에 사용한 국가들은 괜찮겠지만, 이 돈을 소비에 쓴 브라질 같은 국가들은 어려운 시기를 보낼 것"이라고 했다. 브라질로선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을 테다.
짜증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을 매고 그들의 결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우리(다른 신흥국들을 포함해서)의 현실이다. 그들은 그저 그들만의 길을 걷고 있는데, 우리는 그 행보가 미칠 파장에 일희일비해야 하는 처지다.
3년여 전으로 시계를 되돌려 보자. 2010년 관가는 서울에서 열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문에 잔뜩 고무돼 있었다. 줄곧 변방에 머물며 설움을 곱씹어야 했던 우리나라가 미국, 중국, 유럽, 일본과 같은 멤버십(G20 회원국 자격)을 얻었고, 더구나 안방으로 이들 정상들을 불러모은 뒤 의사봉까지 두드리는 역할까지 맡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특히 우리는 미국에 넙죽 절을 해야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죽은 G7(the late G7)'을 대신해 G13, G14 등이 거론될 때 우리나라를 비롯해 신흥국을 대거 포함시키는 G20 정상회의를 가동하자고 주장한 것이 미국이었고, 우리나라에 통화 스와프 수혜를 베푼 것도 미국이었다.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G20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야 한다"는 미국 요구가 우리에겐 너무 고마운 얘기였다.
이제 와 돌아보면 낯 뜨거운 기억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아쉬울 때 내밀었던 손을 덥석 잡고는 마치 우리가 대단한 성과를 낸 양 호들갑을 떨었던 셈이니까. 미국이 경기 회복 국면으로 접어든 지금, 이제 G20의 존재감은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이 각자 제 갈 길을 가자고 하는 마당이니 당연한 얘기다. 이 달 하순 호주에서 열리는 올해 첫 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서 신흥시장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뤄진다지만, 별반 기대할 것은 없어 보인다.
차기 한국은행 총재의 제1 덕목이 글로벌 인맥이라고 얘기하는 이들이 있다. 언제 어느 때든 스스럼없이 재닛 옐런 Fed 의장 등과 소통하며 우리 의견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순진한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것 보시오. 옐런 의장이 한은 총재에게 눈길이라도 한 번 줄 것 같소?"
이영태 경제부 차장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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