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매력은 낯선 환경에 자신을 던지는 것에 있다. 시끄럽지만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상식을 무너뜨리는 (너무 비싼 혹은 너무 싼) 물가, 왼쪽이 아닌 오른쪽에 달린 자동차 운전대, 한글도 알파벳도 아닌 요상한 문자로 뒤덮인 표지판들… 소소한 생경함과 유쾌한 불편함은 일상에 중독된 이들에게 청량한 해독제로 작용한다.
그 중 백미는 여행 첫날 저녁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을 때 머리를 받치는 베개다. 잘 건조된 흰 커버에 싸여진 푹신하고 빵빵한 베개에 얼굴을 묻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집을 떠나 낯선 곳에 왔음을 실감한다. 집 베개의 움푹 파인 머리 자국이 쳇바퀴 같은 일상을 재확인시킨다면,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처럼 깨끗이 펼쳐진 호텔 베개에는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기운을 재충전시키는 힘이 있다.
최근 이 호텔 베개를 집에서도 이용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파르나스 호텔의 관계자는 "객실에 있는 모든 용품을 판매하는데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이 베개"라고 귀띔했다. 롯데호텔은 베개 구입 문의가 늘자 지난해 8월 베개를 비롯한 침구류 일체를 '해온'이라는 브랜드로 만들어 출시했다. 호텔 관계자는 "2월 3일 현재 매출이 약 8,000만원인데 이중 거위털 베개의 판매율이 43%로 가장 높다"며 "30~40대 싱글 여성들과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신부가 주 고객"이라고 밝혔다.
오리털 VS 거위털, 솜털 VS 깃털
호텔 베개에 대한 수요는 높지만 기준은 애매한 상황이다. 시중에 '호텔 베개'라는 이름으로 2만~3만원대에 나온 제품이 있지만 만족도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인터넷에서는 거위털과 오리털, 솜털과 깃털의 비율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이것저것 따지기 귀찮아 그냥 비싼 것으로 사자니 지갑이 울고, 그렇다고 무조건 저렴한 베개를 고르자니 어쩐지 꺼림직하다.
"일반적으로 오리털 보다는 거위털, 그 중에서도 깃털보다는 솜털이 많이 들어간 베개를 고급으로 칩니다. 요즘 호텔 베개에는 거의 거위털을 사용하죠." 침구 브랜드 소프라움 서수정 실장의 말이다. 소프라움은 국내에서 사용하는 거위털의 80% 이상을 공급하는 태평양물산이 자체적으로 만든 브랜드다. 베개, 다운 파카, 침낭 등 거위털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국내 업체가 이곳에서 재료를 받는다.
오리털보다 거위털 베개가 비싼 이유는 복원력, 습기조절 능력, 가벼움, 보온성 등 모든 면에서 더 우수하기 때문이다. 가격도 거위털이 오리털에 비해 40% 가량 높다. 거위털은 다시 거위 솜털(구스 다운)과 거위 깃털(구스 페더)로 나뉘는데, 거위의 가슴 솜털이 더 가볍고 따뜻하다. 호텔 베개의 핵심은 머리를 뉘었을 때 푹신하게 꺼졌다가 다시 팽팽하게 차오르는 복원력(필파워∙fill power)인데 이를 담당하는 것도 솜털이다.
"구스 다운의 함량을 따지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가장 정확한 기준은 필파워입니다. 세계 최고급인 폴란드산 구스 다운 80%인 베개가 중국산 구스 다운 90% 베개보다 더 좋을 수 있다는 얘기죠. 좋은 솜털이 많이 들어갈수록 필파워가 높아지기 때문에 필파워가 높은 것을 고급 베개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필파워는 솜털이 부풀어오르는 정도를 숫자로 표기한 것으로 600 이상이면 우수한 축에 속한다. 현재 국내에 유통되는 거위털 중에서는 1000이 최고치다. 서 실장은 그러나 "베개는 취향을 많이 타는 품목 중 하나이므로 모두에게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단서를 달았다. '최고급 베개'는 있어도 '최선의 베개'는 없다는 얘기다. 솜털만으로 베개를 채우면 지나치게 푹신해서 머리를 든든히 받쳐주는 맛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 꺼리는 사람도 있다. 이 때문에 국내 호텔 객실에 사용되는 베개는 거위의 솜털과 깃털을 반반 섞은 것이 가장 많다. 사용하는 거위털은 대부분 헝가리산으로, 폴란드와 시베리아산보다 한 단계 아래지만 최고급에 속하는 털이다.
이밖에 크기와 중량도 베개의 가격을 좌우하는 요소이지만 규격이 거의 고정돼 있어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크고 무거울수록 충전재가 많이 들어가서 더 비싸다.
호텔 베개, 집에서도 제대로 즐기는 법
고객의 구매 요청에 대응하기 위해 대부분의 호텔에서는 비공식적으로 베개를 판매하고 있다. 인기가 높은 만큼 불만의 목소리도 많은데 그 중 가장 많은 불만이 "호텔에서 느꼈던 그 느낌이 안 난다"는 것이다. 롯데호텔과 쉐라톤그랜드워커힐에 베개를 납품하는 현대장식의 장혜영 실장은 "호텔 베개 특유의 느낌은 매트리스나 이불과의 궁합에서 나오는 바가 크다"고 말한다. 베개만으로 호텔에서 느꼈던 안락함을 고스란히 집으로 가져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는 베개 커버 안에 속 커버를 덧씌우는 것, 베개 보다 크기가 약간 작은 커버를 택하는 방법을 추천했다.
"호텔에서는 커버를 이중으로 씌우기 때문에 더 팽팽하게 느껴測?면이 있어요. 커버의 크기가 약간 작아도 비슷한 느낌을 낼 수 있습니다."
호텔에서 하는 것처럼 베개를 두 개 포개 쓰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있다. 호텔 신라는 거위털 베개 아래에 오리털 베개를 겹쳐 쓰는데, 이렇게 하면 안정감도 높아지고 거위털 베개 두 개를 사는 것보다 경제적이다.
관리도 중요하다. 거위와 오리는 물새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물빨래가 가능하다. 전문가들은 드라이클리닝을 하면 털의 지방분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오히려 물빨래가 더 나을 수 있다고 말한다. 너무 자주 세탁하는 것도 좋지 않다. 웨스틴 조선호텔의 객실관리부서에 있는 이유진 대리는 "거위털 베개는 너무 자주 빨면 푸석푸석해진다"며 "호텔에선 3개월을 주기로 세탁하지만 가정에서는 그보다 덜 세탁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세탁보다 중요한 것은 건조다. 동물의 털은 제대로 말리지 않으면 부패하거나 냄새의 원인이 된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말린 뒤 충분히 두드려 털을 살려줘야 오래 두고 쓸 수 있다.
호텔 베개, 어디서 어떤 베개 쓸까
롯데호텔
침대업체 시몬스와 공동 개발한 브랜드 '해온'에서 호텔에서 사용하는 침구류 일체를 판매하고 있다. 거위털 이불, 침대 시트, 베개 2개, 목욕가운 2벌, 목욕 타올 2개, 세안용 타올 2개로 구성된 침구 세트의 가격은 100만~125만원. 모든 품목을 따로 구매할 수 있으며 베개 가격은 18만원. (02)771-1000
웨스틴 조선호텔
웨스틴 사에서 개발한 헤븐리 침구를 전 계열사에서 동일하게 쓰고 있다. 헝가리산 솜털 50%, 가슴털 50%로 이뤄진 베개의 가격은 22만원. 베개와 커버의 기본 구성에 속커버가 하나 더 포함돼 있다. (02)317-0339
호텔 신라
지난해 8월 리노베이션 이후 전 객실에 헝가리산 거위털 베개를 비치하고 있다. 솜털 90%, 깃털 10%로, 호텔 베개 중 솜털 비율이 가장 높다. 현재는 판매하지 않지만 조만간 일반에 판매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02)2233-3131
리츠칼튼 서울
가로 길이가 1m인 초대형 헝가리산 거위털 베개를 쓴다. 중량도 1,500g으로 보통 1,000g인 다른 베개보다 무겁다. 이전에는 판매했지만 최근 물량이 부족해 일반에 판매는 하지 않고 있다. (02)3451-8000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복원력이 좋은 헝가리산 거위 솜털과 깃털을 반반 섞은 베개를 쓴다. 고밀도 사틴면으로 만든 베갯잇을 포함해 18만7,000원. (02)555-5656
W서울 워커힐
세로 51㎝×가로 66㎝와 세로 51㎝×가로 91㎝, 두 가지 사이즈의 거위털 베개가 구비돼 있다. 호텔 1층의 'W호텔스 더 스토어'에서 판매한다. 작은 것은 25만3,000원, 큰 것은 29만7,000원. (02)465-2222
더플라자
솜털 50%, 깃털 50%의 거위털 베개를 사용한다. 60수 면 커버까지 포함해 11만원에 판다. (02)771-2200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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