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4월 6일. 아프리카 중부 르완다의 쥐베날 하비야리마나 대통령과 브룬디의 시프리안 응타랴미라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르완다 수도의 키갈리국제공항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는 도착하기 직전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하고 말았다.
참사 이후 르완다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못지 않은 참혹한 종족 분쟁이 발생했다. 다수 종족이던 후투족의 투치족에 대한 대량종족학살(제노사이드)이다. 정부와 지자체 등 행정조직의 선동에 홀리기라도 한 듯 변변하지도 않은 무기를 들고 불과 석 달 사이 이웃 사이에 벌어진 학살로 117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여성들에 대한 집단강간도 무차별로 자행됐다. 당시 유엔평화유지군을 이끌었던 로메오 달레르 중장은 유엔의 무기력한 대응 등으로 이런 사태를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해 한참 뒤 자살을 기도했을 정도다.
사건 뒤 르완다에서는 유엔 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학살의 책임을 묻는 국제재판이 열렸다. 르완다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의 재판이 있었다. 르완다 제노사이드 20년을 맞는 올해 이 학살 범죄자에 대한 재판이 프랑스에서 다시 시작됐다. 프랑스는 과거 르완다 정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오면서 르완다 전쟁범죄자들의 피난처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오명을 씻기 위해 칼을 빼든 것이다.
외신에 따르면 집단학살과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된 전 르완다 정보기관 최고책임자 파스칼 심비캉와(54)의 재판이 4일 파리법원에서 열렸다. 심비캉와는 투치족을 살해하도록 후투족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지침을 전달하는 등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20년 만에 재판장에 선 전직 정보기관 수장의 모습은 하지만 초라했다. 2008년 프랑스령 마요트섬에서 체포된 심비캉와는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돼 휠체어에 의지한 채로 법정으로 들어서 방탄 유리 뒤에서 재판을 받았다.
심비캉와의 변호인은 이날 재판 내내 "그는 르완다 학살사건의 희생양"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변호인은 "그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목격자를 찾아야 하는데 그는 르완다로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서 "이번 재판은 변호권이 보장되지 않는 만큼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프랑스 정부에게 르완다 제노사이드는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사건이다. 사건 발생 전 프랑스는 르완다 군대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학살이 종결된 후 투치족의 반격이 이어지자 후투족 지도자들을 이웃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피신시켜 주거나 망명의 형태로 그들 대부분을 받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국에 숨어든 르완다의 학살자들을 단죄는커녕 기소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대응에 국내 여론마저 나빠지자 프랑스 정부는 해외의 전쟁범죄를 다룰 수 있도록 지난해 사법체계까지 개편해 재판을 준비했다. 프랑스 법원은 이번 심비캉와의 재판을 시작으로 르완다 대학살 관련 27건의 전쟁 범죄를 다룰 계획이다.
이번 재판은 6~8주간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르완다 언론인과 정보기관 관계자, 농부 등 최소 50명이 심비캉와의 혐의를 입증하기 증인석에 설 예정이다. 유죄가 인정될 경우 심비캉와는 최고 종신형을 선고 받을 것으로 외신은 전망했다. 미국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관계자는 "이번 재판은 전쟁 범죄자들을 단죄하려는 세계적인 노력의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프랑스는 더 이상 그들의 피난처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이번 재판에 의미를 부여했다.
르완다 대학살
르완다 대학살은 1994년에 발생한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종족 분쟁이다. 후투족은 750만에 이르는 르완다 인구의 84%를 차지하는 다수 부족이면서 오랜 세월 소수 부족인 투치족(15%)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왔다. 특히 1916년 르완다를 식민통치하던 벨기에가 투치족을 우대하고 후투족을 홀대하는 종족 차별정책을 펴면서 골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은 1973년 후투족 출신 쥐베날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으면서 뒤집어졌다. 차별에 시달렸던 후투족이 르완다의 실권을 장악했는데, 그것이 대통령 탑승 비행기 격추 사건으로 물거품 될 상황이 되자 후투족 강경파의 보복이 시작돼 대학살로 이어졌다.
아프리카 종족 분쟁의 참혹한 실상은 물론 전쟁범죄에 대한 유엔의 무기력한 대응을 새삼 일깨워준 이 사건은 서구의 여러 언론인들의 르포 등을 통해 조명됐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 '호텔 르완다'는 2004년 아카데미, 글든글로브상 후보에도 올랐다. 르완다 대학살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인간 속에 숨겨진 악마적인 속성을 드러내주는 참혹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학살은 1994년 7월 투치족의 '르완다 애국전선'이 수도를 점령하면서 끝났다. 이후 내전도 종결되고 종족간에도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 정국은 안정됐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