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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탐조여행 "뚜뚜루룩~" 3중 민통선 탐조여행 철책 너머로 퍼지는 천국의 코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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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탐조여행 "뚜뚜루룩~" 3중 민통선 탐조여행 철책 너머로 퍼지는 천국의 코러스

입력
2014.02.0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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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9도. 아침 안개에 숲은 온통 하얗게 얼어붙어 나무의 윤곽이 지워져 있다. 기다란 백색 산릉에 드문드문 박힌 다홍 빛깔의 표지판이 도드라져 보인다. 시침질한 바늘땀 같다. 가로 2.4m, 세로 2m의 오렌지색 금속판은 비무장지대 남쪽 철책을 따라 일렬로 세워져 있다. 월경방지 항공 표지판이라고 했다. '뚜르륵, 뚜-욱.' 목이 좁고 긴 새가 내는 소리가 다가왔다. 새는 무리 지어 날아왔다. 무리는 북으로 날아가는 것에 위협을 가하는 붉은 금속의 재봉선을 가벼이 넘어갔다. 그 선은 새의 날개가 아니라 사람의 발을 묶어 두는 것이어서 나는 새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뚜뚜루룩-' 새의 소리가 안개에 묻혀 멀어져 갔다.

"너 그거 쓸 수 있겠니?"

두루미 탐조여행 기사를 쓴다니까 누가 그렇게 말했다. 병에 걸려서 죽고, 병에 걸릴지도 몰라서 떼로 죽이는 살벌한 뉴스가 남쪽에서 번지고 있었다. 겨울을 나기 위해 수천 ㎞를 날아온 철새를 원인으로 지목해 버리는 것이 이번에는 두루 편한 일인 듯했다. 그런 종류의 편리에 좀처럼 섞여 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이번 겨울은 탐조여행의 좋은 계절이 될 것 같다. 숨 죽이고 다가가 보면 안다. 살아 있는 생명이 맞는 아침이 어떤지. 가볍게 죽이고 파묻어 버리는 것에 붙은 숨이 어떤 것인지도. 가둬둘 수도 만져볼 수도 없이 멀찍이 바라봐야 하기에, 철새를 찾아가는 여행은 오히려 자연에 가장 가까워지는 여행일 것이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지난달 22일 두루미를 찾아갔다. 두루미 탐조 여행지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강원 철원군이다. 한탄강 유역 논에서 낙곡을 주워먹는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올 겨울에도 수백 마리의 두루미와 재두루미가 철원을 찾아 왔다. 가 봤더니 과연 두루미가 많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료처럼 뿌려 놓은 곡식을 주워먹는 모습이 왠지 마뜩지 않았다. 한탄강변엔 몰려드는 사진쟁이를 위해 컨테이너와 비닐 포장으로 만든 촬영시설도 있다. 강여울에서 잠드는 두루미에게 방해가 덜 되도록 설치한 것이다. 하지만 컨테이너 속에 망원렌즈를 걸쳐놓고 빽빽이 들어앉은 모습이 비좁은 골프연습장처럼 불편해 보였다. 거기 잠깐 있다가 연천으로 이동했다.

경기 연천군은 철원과 함께 대표적인 두루미 월동지다. 현재 전 세계 3,000마리 정도의 두루미가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 3분의 1이 한국에서 겨울을 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 강화, 김포, 파주에서 10~20마리씩 겨울을 보내는 두루미를 제외하면 모두 철원과 연천으로 온다. 연천으로 오는 숫자가 철원의 절반쯤 된다. 재두루미의 숫자는 철원과 연천 각각 두루미의 두 배가 조금 넘는다.

"언젠가 이 근방에서 면장까지 지낸 분이 그런 말씀을 하더라고요. 젊을 때 두루미 고기를 먹어 봤다고. 지금은 천연기념물(제202호ㆍ멸종위기야생동식물 1급)로 지정됐지만 1960년대까지는 그냥 사냥감이었어요. 그래서 20년 넘게 자취를 감췄습니다. 두루미가 다시 이곳을 찾아온 것은 1990년쯤의 일이에요."

DMZ생태관광해설사 백승광씨의 설명을 듣자니 연천이 두루미 월동지로 남은 것은 두루미가 아니라 사람에 관한 일인 듯했다. 새끼를 적게 낳고 두려움이 많은 두루미는 다른 어떤 천적보다 사람을 피한다. 시베리아 우수리 지방과 일본 홋카이도 등 두루미가 머무는 곳은 모두 인구 밀도가 매우 낮은 곳이다. 남한에서 사람이 가장 적은, 아니 사람의 해를 입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이곳 비무장지대다. 몇 해 전까지는 연천 읍내에서도 간간이 두루미를 만날 수 있었지만 이젠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주민보다 고라니 숫자가 월등히 많은 그곳, 임진강이 철책선을 관통해 곡류하는 접경지대에서 야생 상태로 살고 있는 두루미와 재두루미를 만날 수 있다.

"아, 쓸 데도 없는데 물은 왜 가두는지 몰라. 작년부터 여기는 더 이상 두루미가 앉지를 못해요. 여기가 제일 좋은 잠자리인데…."

연천의 두루미를 보려면 28사단이 관리하는 민통선을 통과해야 한다. 신분증을 맡기고 방문 목적('관광'이라고 해야 한다)을 밝히면 일반인도 출입이 가능하다. 태풍전망대 쪽으로 가다가 언덕을 하나 넘으면 왼쪽 강여울 곁에 탐조를 위해 설치해 둔 시설이 있다. 이곳은 임진강이 민통선 안에서 마지막으로 여울을 이루는 곳으로, 일제 시대 놓다 만 다리(장군교)의 이름을 따서 장군여울이라고 부른다. 거기서 만난 주민 원화식씨는 그러나 그곳에선 더 이상 두루미를 볼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두루미는 삵 같은 천적을 피하기 위해 얕은 물이 얼지 않고 흐르는 여울에 안식처를 마련한다. 그런데 이태 전 완공된 홍수조절용 댐인 군남댐이 물을 채우기 시작하면서 수위가 올라가 여울이 사라져 버렸다.

장군여울에서 1㎞ 가량 더 들어가면 빙애여울이 있다. 현재 두루미가 가장 많이 모여 잠을 자는 곳이다. 민통선 출입은 오전 9시부터 가능하다. 그래서 일찍 가 봐도 두루미는 이미 먹이를 찾아 떠나고 십여 마리만 남아 물고기를 찾아 여울을 뒤지고 있기가 쉽다. 하지만 기온이 영하 20도 아래까지 떨어지는 혹독한 날씨라면, 아직 몸이 덜 풀린 두루미들이 서로의 체온에 기대 모여 있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기온이 뚝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찾아간 것이 그 까닭이다.

도착한 지 20분쯤 지났을까. 구릉을 넘어온 햇살이 서서히 여울에 스며들자 두루미가 차례로 하루의 비행을 시작했다. 마치 비행기들이 공항 관제에 따라 이륙하는 모습 같았다. 두루미는 뚜루룩거리는 소리로 제 피붙이를 불렀고 가족이 함께 날아올랐다. 비상한 두루미는 각자의 먹이터로 떠나기 전에 몇 바퀴 크게 선회했다. 푸른 빛이 도는 한겨울의 아침 속에서 커다랗고 하얀 날개들이 겹쳐지고 나뉘면서 안개 속을 떠다녔다. 우아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을 우아한 장관이 머리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활기차다기엔 너무 고요하고, 몽환적이라기엔 너무 금세 지나가버리는 풍경이었다. 그 모습이 잔영이 돼 망막에 오래 남았다.

일반인이 갈 수 있는 곳은 횡산리에 있는 평화습지원까지다. 약간의 꼼수를 썼다. 환경부로부터 철새 AI조사를 의뢰 받은 한탄강지키기운동본부의 차량을 얻어 타고 더 들어갔다. 착탄한 소총을 비껴 맨 군인들 외엔 사람을 마주칠 일 없는 그곳에서 훨씬 많은 두루미를 볼 수 있었다. 운동본부 이석우 대표는 "민통선 안에도 관광객이 늘면서 두루미들이 점점 더 군사분계선과 가까운 곳으로 서식지를 옮겨가고 있다"고 말했다. 자발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관광객 말고도 연천의 두루미에겐 다른 위험이 커지고 있었다. 인삼밭이다. 연천에서 겨울을 나는 두루미의 주식은 율무인데, 율무밭이 점점 수익성이 높은 인삼밭으로 바뀌고 있다. 인삼밭은 주워 먹을 낙곡이 없고 농약을 많이 치기 때문에 철새의 생태에 치명적이다.

비무장지대로 들어가는 통문의 안쪽, 강줄기 한복판 남과 북 가운데 어디에 속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모래톱이 보였다. 기다렸더니 대여섯 마리의 두루미가 거기로 날아가 물 속에 부리를 박아 넣었다. 이 대표는 최근 그곳에 두루미들이 깃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제 아무리 편법을 동원해도 사람이 닿을 수 없는 폭으로 두루미의 공간이 좁아지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3중 철책 너머 보는 두루미의 모습은 그렇게 아름답고 또 안타까웠다.

■ 여행수첩

●의정부에서 연천 방향 3번 도로를 타고 계속 직진하면 된다. 연천읍에서 군남면 방향으로 좌회전, 이후 중면사무소를 찾아가면 된다. 삼곶리 민통선 초소가 바로 앞에 있다. 내비게이션을 쓸 경우 목적지로 '태풍전망대'를 입력. ●민통선 출입 가능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다. 연중무휴. 태풍전망대까지 차량을 몰고 들어갈 수 있다. 사진촬영은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횡산리에 철새와 습지 식물의 생태를 관찰할 수 있는 임진강 평화습지원이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해설사가 근무한다. ●철원으로 넘어가는 길목 경원선 철길 폐터널에서 고드름이 거꾸로 자라는 현상을 볼 수 있다. 3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오른쪽에 있다. 연천군 문화관광과 (031)839-2061 한탄강지키기운동본부 (031)832-2120

연천=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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